임진전쟁 시기 영·호남 의병의 성격 再考
Reconsideration on the character of the Yeongnam and Honam area Righteous Army in Imjin war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8)
- 주제(키워드) 임진전쟁 , 임진의병의 성격 , 영남의병 , 호남의병 , 임진전쟁의 추이 , 중화사상.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 지도교수 계승범
- 발행년도 2016
- 학위수여년월 2016.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59845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임진전쟁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조선은 7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의 감소, 경작지의 황폐는 물론이고 신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이 임진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의병의 활약이었다. 당시 임진의병은 지역별로 의병장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지리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현재 임진의병의 성격 관련 연구에 따르면 영남 의병은 향보적인 성향을 가졌고, 호남 의병은 근왕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통설의 근거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본군의 침입경로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부산을 통해 침입했다. 이로 인해 영남 지역은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입경로에 해당되었으며, 피해도 상당했다. 이에 반해 호남 지역은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입경로에 해당되지 않았고, 피해도 영남 지역에 비해 크지 않았다. 두 번째는 의병 활동 지역의 차이다. 영남 의병들은 자신들의 거병한 곳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으며, 호남 의병들은 자신들의 거병한 곳에서 의병 활동을 한 것이 아닌 他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 마지막으로는 병력 규모이다. 영남 의병들은 소규모로 독립된 부대가 제각기 활동을 했고, 호남 의병들은 대규모로 연합된 부대가 활동을 했다. 그러나 영·호남 의병의 성격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먼저 호남 의병은 일본군의 ‘팔도분할계획’으로 인해 호남이 위험에 처하자 북상했던 부대를 회군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경명의 ‘호남 연합의병’이었다. 제 1차 금산성 전투 이후 호남 의병이 크게 네 갈래로 나뉘었는데 이 부대들은 호남을 지키려는 향보적인 성향을 지녔다. 영남 의병들은 자신들의 지역만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영남 지역에서만 활동을 했으나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해 병참 기지 혹은 후방 기지에 대한 타격을 실행하거나, 주요 요충지를 선점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이 호남 지역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주성으로 병력을 보내는 등 전국적인 차원의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듯 영·호남 의병의 성격은 전쟁의 추이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이처럼 성격이 지속적으로 변화한 임진의병은 공통적으로 적용된 사상이 있었다. 바로 ‘중화사상’이었다. 당시 의병장들의 발언을 통해 거병을 한 이유가 중화질서를 수호하기 위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의병 뿐 아니라 한말의병 역시 중화사상에 입각해 거병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재의 임진의병 관련 연구에는 3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임진의병을 설명할 때 그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임진의병의 활동 및 성격을 논할 때 ‘鄕兵’이라는 용어를 남발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병장 위주로 의병의 성격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임진의병 관련 연구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버리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의병을 바라보며, 의병의 개념을 정확하게 인지하여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분석해야 한다. 치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임진의병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연구가 나타나길 고대한다.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