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地方統治 運營 硏究
A Study on the Operation of the Koguryo's Local Ruling
- 주제(키워드) 고구려 , 지방통치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대학원
- 지도교수 이종욱
- 발행년도 2009
- 학위수여년월 2009. 2
- 학위명 박사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45087
- 본문언어 한국어
초록/요약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how operated loacal ruling in all period of the Koguryo. Existing researches have noticed that the contents of local ruling changed according to degree of centralization. The local ruling changed from Na-Bu(那部) system to Centralization system. These studies have few problems. First, moves the capital a possibility of affecting against local ruling overlooked. Second, historical data of long period handled as one period. Third, actual local ruling as taxes receiving, levies a labor power was negligent, Fourth, the degree where the sovereign power governs a region does not express. Fifth, developmental process of local rule does not track, Sixth, Chinese historical data considered seriously more than SamkukSagi(三國史記). This study paid attention moves the capital, and tried to observe the Koguryo's local ruling changes. The result of this study can be sketched like this. From found a country to A.D ending of 2th century, the beginning of local ruling is formed. Tried to observe first of all about Five department(오부). In the Wanggi(왕기)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names of Dong, Seo, Nam, Buk, and Jung(East, West, South, North and Center). In the Wangdo(왕도) region, there was none department. In the regional areas, Na-Bu(那部) was formed in Ye-Maek(예맥) area. For each of these Na-Bu, BuJang(부장) was dispatched, respectively to be responsilble for ruling. In the regional areas, Seong-eup(성읍) was formed except Ye-Maek(예맥) area. For each of these Seong-eup, Soo(守) was dispatched, respectively to be responsilble for ruling. The operation of local rule the tax collection and manpower mobilization accomplished indirectly control. A sovereign power can not able to control local dominant. But King Yurimyoung(유리명왕) carries out moves the capital to Kuknae(국내) area. From after that, a sovereign power was strengthened. From ending of 2nd century to ending of 4th century, the local ruling is developed more step. Tried to observe first of all about Five department. In the Wanggi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names of Dong, Seo, Nam, Buk, and Jung(East, West, South, North and Center). In the Wangdo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th names of Jeon, Hu, sang, Ha, and Jung(Front, Back, Up, Down and Inner) . In the regional areas, Na-Bu and Seong-eup still existed. For each of these Seong-eup, Tae-soo(태수) and Jae(재) was dispatched, respectively to be responsilble for ruling. King Sansang(산상왕) carries out moves the capital to HwanDo-seong(환도성) in Kuknae area. From after that, local rulng system was upgraded. The operation of local rule the tax collection and manpower mobilization accomplished directly control. This operations smoothly, became accomplished, for example like the records which come out to 「GwanggaetowangBi(광개토왕비)」. A sovereign power was more than strengthened previous period. King killed king's brothers. As a result, the throne succession was established. The kingcraft was more considered seriously previous period. From ending of 4th century to ending of 6th century, local ruling system was completed. King Jangsoo(장수왕) carries out moves the capital to Pyoungyang-seong(평양성) in Pyongyang area. From after that, local rulng system was completed. Tried to observe first of all about Five department(오부). In the Wanggi(왕기)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names of Dong, Seo, Nam, Buk, and Jung(East, West, South, North and Center). In the Wangdo(왕도)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th names of Jeon, Hu, Sang, Ha, and Jung(Front, Back, Up, Down and Inner) and were again divided into sections(리방제). Meantime, th secondary capital was operated. Kuknae-seong(국내성) and Han-seong(한성) was secondary capital. In the regional areas, Five department was formed as countrywide classification. The administrative unit was composed Wide area, Gun(군), and Hyon(현). In middle Koguryo to Song(Gok), Jae(재) was nominated, to Gun, Tae-soo(태수) was nominated, to Wide Area(광역), Susa(수사) was nominated. The operation of local rule the tax collection and manpower mobilization all smoothly, became accomplished, for example like the records which come out to 『Juso(주서)』 and 「Pyongyangsong Gak jas ongsok(평양성 각자성석)』. From ending of 6th century to fall of Koguryo, local ruling accomplished three layer of castles. King Pyongwon(평원왕) carries out moves the capital to Jangan-seong(장안성) in Pyongyang area. Tried to observe first of all about Five department. In the Wanggi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names of Dong, Seo, Nam, Buk, and Jung(East, West, South, North and Center) and in each region, Yoksal(욕살), the position which can be compared to the local ministry was dispatched to take charge of the ruling. In the Wangdo region, there was Five department with th names of Jeon, Hu, Sang, Ha, and Jung(Front, Back, Up, Down and Inner) and were again divided into sections. In the regional areas, Five department was formed as countrywide classification. Five department used the names of ruling castles instead of each district and the regions consisted of administrative units made up of 3 castles ; Jedaesong(제대성)-Jesong(제성)-Jesosong(제소성). For each of these castles, Yoksal(욕살), Choryogeunji(처려근지), and Rucho(누초) were dispatched, respectively to be responsilble for ruling. The administrative unit Jedaesong was grasped with Bu(부), Jesong was grasped with Gun(군), Jesosong was grasped with Hyon(현). The local rule of late Koguryo is that the local rule of middle Koguryo advances. In middle Koguryo to Song(Gok), Jae(재) was nominated, to Gun, Taesu(태수) was nominated, to Wide Area(광역), Susa(수사) was nominated. This secretary region were converted with Yoksal, Choryogeunji, and Rucho of late Koguryo. The operation of local rule the tax collection and manpower mobilization all smoothly, became accomplished, for example like the records which come out to 『Juso(주서)』, 『Suso(수서)』, 「Gwanggaetowang Bi(광개토왕비)」, and 「Pyongyang seong Gakja-songsok(평양성 각자성석)』. But to Koguryo final period the ability of Secretary region retrogressed gradually. For example like Ogolsong Yoksal(오골성욕살). So to lose the ability ultimately will be able to execute as proxy a sovereign power. It was because of power dispute, fatigue of the government authorization which follows in the foreign warfare which is continuous, and senile actual condition of state operation system accompanied to it, happened in Koguryo final period. The development of local rule is the instance which shows meaning which is a movement in the political power center. To initially, the power people of region participated to the government authorization. And the power people moved the center of the nation gradually. To golden age the kingcraft became core of power. But, to final period the power was dispersed again at region.
more초록/요약
이 연구의 목적은 고구려 전 시기에 걸쳐 지방통치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살피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의 고구려 지방통치에 관한 연구는 크게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되어 진행되었고, 중앙집권화의 정도에 따라 내용이 규정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전기의 나부체제에서 중기의 중앙집권적 체제로, 다시 후기의 쇠락기로 지방통치가 운영되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같은 연구들은 첫째 국가 중심의 이동인 천도 사실과 같이 지방통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십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매우 오랜 시간적 격차를 지닌 사료를 하나의 시기로 파악함으로써 변화상이 제대로 파악될 수 없었다는 점, 셋째 실제 지방통치 운영의 실상에 대해서 소홀했다는 점, 넷째 왕권의 지방 지배력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 다섯째 지방통치의 계기적 발전과정에 대한 추적이 미흡했다는 점, 여섯째 사료의 무게중심을 『삼국사기』에 두지 않고 중국측 사서에 두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고구려사상의 천도 사실에 주목하고 이 천도들을 기점으로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봄으로써 고구려 지방통치 변화과정을 살피고자 하였다. 연구에서 이른 결론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국시기인 기원전 3세기말부터 기원후 2세기말까지는 초기 지방통치의 성립과정이었다. 이때는 예맥지역의 나국들과 예맥 이외 지역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지배하였다. 처음에는 피정복지역의 지배집단을 활용한 간접지배방식을 사용하다가 유리명왕대 국내 천도를 계기로 나부에는 부장이, 기타 성읍에는 守를 파견하여 직접지배방식으로 변화를 도모하였다. 원래 나국이었던 예맥지역 소국은 복속된 후 시간이 흐르면서 나부가 되어 행정구역화되었다. 또 기타 성읍화된 지역은 소국 지배층을 사민시키고 해당지역에 守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현지 지배계층과 함께 통치하도록 하였다. 나부와 성읍 아래에는 곡집단이 편제되었는데 곡집단 가운데 왕권과 밀착된 세력들의 존재가 엿보이며 이들은 곧 신분 상승까지도 가능한 중앙신료집단화되었다. 왕경의 경우에는 왕기가 방위명을 사용하는 五部로 구성되었다. 대체로 국내 천도 이후 성립되었으며 이들 왕경에 대한 통치는 왕이 직접 지배하는 직할령의 개념이었다고 판단된다. 조세 수취는 초기에는 재지세력을 활용한 간접적이고 집단적인 조세 수취와 역역동원을 시행하였다. 요컨대 전기의 지방통치는 1단계 통치체계로 지방의 최하위 단위까지 국가가 파악할 수 없는 단계였다. 이 시기 고구려 왕권은 지방화된 지역에 완전한 지배력을 관철시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왕권과의 갈등으로 인해 집단으로 이탈하는 세력들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제가들은 나름대로 자치권을 부여받으며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리명왕대 국내 천도를 기점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왕법의 실현이 구체화되었으며 이는 결국 2단계 지방통치체제로 넘어가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말부터 4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는 지방통치체계가 발전하는 시기였다. 2세기 말부터 곡-촌 단위까지 파악이 되고 있다. 이 대민파악을 토대로 3세기 초에는 전기 守의 1단계 통치체계에서 태수-재라는 2단계 통치체계를 구현했다. 때문에 민에 대한 파악과 관리가 훨씬 수월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광활한 영토가 확보되는 광개토왕대에는 필요한 지역에 수사직이라는 광역의 지방관이 설정되었다. 지방의 구조는 나부․성 - 성․곡 - 성․촌의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연적인 지방단위보다는 인위적인 편제단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개별적인 민에 대한 관리가 가능하게끔 편제를 하였던 것이다. 왕경지역은 왕도와 왕기로 구분되어 있었다. 왕기는 전기의 동서남북부 방위명 부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왕도는 전후상하부라는 방향명 부로 구획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가구 단위로 민을 파악하고 관리했지만 역역 동원시에는 해당 역역의 특성에 따라 가 단위로 차출하거나 곡 또는 촌단위로 차출을 했다. 조세의 수취는 대체로 가구 단위의 빈부를 조사하여 차등적으로 징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왕권은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왕에 의해 동생이 죽임을 당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사항들이 전개되었다. 이와 짝하여 지방통치에 있어서도 전기보다 더욱 왕경이 중시되면서 나부세력의 중앙신료화가 진행되어 몇 대가 지난 후에는 왕경의 부명을 관칭하는 등 소속부의 변경을 나타내게 되었다. 4세기 말에서 6세기 말에 이르는 고구려 전성기는 가장 넓은 영역이 확보된 시기였기 때문에 지방통치체계가 완성되는 기간이었다. 평양 천도는 고구려 시기에 단행된 천도 가운데 가장 파격적이었다. 평양 천도 후에 우선 전국적인 광역을 설정하고, 수사직을 두었다. 그것은 광활한 영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그 결과 하부의 소규모 지방단위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지양하고 권역별로 지방관의 관할 하에 둠으로써 정부의 관리력 제약을 극복하였다. 광역의 하위에는 군현이 편제되었다. 왕경은 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왕도, 왕기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들 지역은 각각 방향명 부와 방위명 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현재 이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방향명 부를 관칭하는 것으로 보아 왕도 출신이 정치세력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왕도에는 늦어도 문자명왕대에 리방제가 시행되어, 왕도 주민들에 대한 보다 강화된 관리와 통제를 하였다. 한편 천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별도제를 운영하여 각각 국내성과 한성을 별도로 삼아 운영하였다. 이들 별도에는 평양성과 같은 5부제가 실시되었다. 장수왕대에는 민호가 예전보다 3배가 증가하였고, 이들에 대해 빈부를 헤아려 차등을 두고 조세를 수취함으로써 국가의 운영기반으로 만들었다. 평양성 각자성석들에서 보이는 역역동원은 주로 9-10등급인 상위사자와 소형급 인물들이 공사책임자가 되어 역역동원에 임하였다. 그러나 국가 전성기임에도 백성들이 북위에 투항하는 등의 사건들이 있었다. 이는 가혹한 조세의 수취 결과로 보인다. 또한 안원왕대 국내지역과 평양지역에 세력기반을 둔 귀족세력들의 권력 쟁탈전과 환도성의 반란 등은 결국 국가 지배세력의 분열을 가져와 고구려 후기에는 왕이 대대로 쟁탈전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6세기 말에서 멸망까지 고구려 후기의 지방통치는 누층적 성 편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五部에 대해서 살펴본 결과 고구려 후기의 五部는 왕도를 지칭하는 방향명 五部와 왕기를 지칭하는 방위명 五部, 그리고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전국적인 五部의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리고 왕기와 전국 五部는 지방으로 취급되어 각각 內評 五部褥薩과 外評 五部褥薩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고 보았다. 지방인 왕기와 전국 五部는 각각 諸大城-諸城-諸小城의 누층적인 성의 등급별로 편제되었으며, 諸大城에는 褥薩이, 諸城에는 處閭近支(道使)가, 諸小城에는 婁肖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모든 성에는 지방관을 보좌하는 속료인 可邏達이 있어서 업무를 분장하여 담당하였다. 행정단위는 諸大城이 부로, 諸城이 군으로, 諸小城이 현으로 파악되었다.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지방통치에서 계기적으로 발전한 형태였는데, 전성기의 城(谷) 또는 邑의 宰-군급 성의 太守-광역의 守事들이 각각 후기의 婁肖-處閭近支(道使)-褥薩로 전환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시기는 평원대 장안성 천도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역역동원에서는 소형급의 하급 관리들이 공사책임자로 동원되어 역역을 수행하였다. 조세 수취는 고구려는 재산의 빈부 상태를 조사해 등급을 매겨서 과세를 하였다. 전성기를 거쳐 후기로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왕정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장수왕대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은 가혹한 과세와 끊임없는 전쟁이 아니었나 추측해 보았다. 결국 안원왕대 귀족의 분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 지방세력들이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왕권은 이미 그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잦은 외침으로 고구려의 전선이 양분화되면서 국가 지방통치는 무너져갔다. 가장 상위의 지방관인 욕살에는 그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는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지방성주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기와 지방인 왕기 출신 연개소문의 집권과 독재정치로 중앙과 지방의 긴밀한 연결망은 끊어지게 되고 이는 곧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more목차
서론 = 1
1. 연구현황과 과제 = 1
2. 연구의 방향과 방법 = 9
제1장 건국~2세기말 지방통치체계의 성립과 운영 = 15
1. 소국 병합과 지방화 과정 = 16
1) 예맥지역 소국의 병합과 나부 편제 = 16
2) 예맥 이외 지역 소국의 병합과 성읍의 편제 = 25
2. 고구려 전기 지방의 구조 = 33
1) 나부 성읍의 구조 = 33
2) 왕경의 구조 = 42
3. 고구려 전기의 지방통치 운영 = 45
4. 고구려 전기 왕권의 지방지배 실상 = 49
제2장 2세기말~4세기말 지방통치체계의 발전 = 58
1. 대외전쟁의 수행과 지방통치의 발전 = 59
1) 2단계 지방통치체계의 성립 = 59
2) 광역권 지방관의 설정 = 66
2. 고구려 중기 지방의 구조 = 75
1) 곡 성의 구조 = 75
2) 왕경의 구조 = 81
3. 고구려 중기 지방통치의 운영 = 85
4. 고구려 중기 왕권의 실상과 지방통치 = 91
제3장 4세기말~6세기말 지방통치체계의 완성 = 99
1. 평양 천도와 지방제도의 편제 = 100
1) 전국적 광역 지방관의 설정 = 100
2) 군현의 편제 = 103
2. 고구려 전성기 지방의 구조 = 106
1) 나부의 변화 = 106
2) 왕경의 구조 = 108
3) 별도의 운영 = 110
3. 고구려 전성기 지방통치의 운영 = 111
4. 고구려 전성기 왕권의 실상과 지방통치 = 115
제4장 6세기말~멸망기 지방통치의 변화 = 121
1. 고구려 후기 지방의 구조 = 123
1) 지방의 五部 = 123
2) 왕기의 五部 = 127
3) 왕도의 五部 = 131
2. 고구려 후기의 지방관과 지방행정단위 = 132
1) 누층적 성의 편제와 지방관 = 132
2) 部-郡-縣制의 시행 = 135
3. 고구려 후기 지방통치의 운영 = 141
4. 고구려 후기의 지방통치와 왕권 = 144
결론 = 150
참고문헌 = 1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