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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의 합리화와 지식인의 생존전략 : 배성룡, 근현대 지식인의 '주변적 전형'(1922~1957)

Rationalization of 'Rationality' and Survival Strategies of Intellectuals: Bae Seong-ryong, ‘Peripheral Paragon’ of Modern Intellectuals(1922~1957)

초록 (요약문)

이 글은 배성룡의 지적 행보를 통해 그간의 사상사와 지식인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배성룡은 일제 식민지기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 ‘화요파’의 이론가로, 해방공간에서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투신한 중도파 정치인으로, 1950년대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思想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다만 그는 이처럼 오랜 기간 정치운동에 투신하고 언론·저술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거나 인상적인 정치적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배성룡을 다룬 선행연구는 그리 많지 않으며, 그나마도 일제 식민지기, 해방공간, 1950년대 이후에 대한 접근이 분절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선행연구의 부족과 단절성은 배성룡이 사상사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없는 인물임을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껏 배성룡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간의 사상사와 지식인 연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거대한 이념에 따라 지식인을 분류하거나, 특정 이념이나 사조가 얼마나 ‘제대로’ 이해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독창적인’ 해석과 전유가 등장했는지를 기준 삼는다면 배성룡과 같은 지식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당대나 지금이나 그다지 조명받지 못한, 하지만 지식인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주변적 전형’이었다. 배성룡의 관심사는 현재 그를 수식하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 식민지기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배성룡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성’이었다. 다만 배성룡이 이야기하는 ‘합리성’의 성격은 시대, 이념, 구조에 따라 적잖이 달라졌다. 그는 이러한 시대, 이념, 구조의 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성’을 합리화해감으로써 당대를 대표하는 유력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지식인으로 계속해서 남을 수 있었다. 일제 식민지기 초기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그러했듯 배성룡 역시 다양한 사조들과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사회주의를 과학과 합리성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가 지도적 이론가로 활동했던 사상단체 ‘화요파’의 입장이기도 했다. 다만 초창기 사회주의자로서 배성룡이 가졌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다.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맑스주의로의 급격한 ‘전일화(專一化)’가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배성룡은 ‘일월회’의 이우적으로부터 속학적 맑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학문과 운동 모두 맑스주의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가 기준이 되었던 식민지 조선에서 배성룡이 설 자리는 없었다. 해방 이후 배성룡은 김규식계 정치인으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분단이 현실화하자 대한민국 지지로 입장을 바꿨다. 배성룡에게 이는 ‘전향’이나 ‘변절’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일제 식민지기 형성된 사민주의적, 혹은 개량주의적 지향을 그대로 이어갔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 아래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던 시기가 지나고, 일단 헌법과 민주적 제도가 수립된 만큼 정치운동 역시 이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배성룡의 입장이었다. 그는 구조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구조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불완전하게나마 나라가 세워지고 민주적 질서가 마련된 가운데, 배성룡이 주장한 ‘합리성’ 역시 정신에서 제도의 차원으로 옮겨갔다. 그는 민주주의 제도에 걸맞은 윤리를 고민하는 동시에, 제도 자체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배성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세계의 사회과학자로 새롭게 떠오른 막스 베버를 주요하게 참고했다. 다만 그의 베버 이해는 ‘반공’이나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당대의 경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전전 일본의 재정경제학자 시마 야스히코(島恭彦)를 참고했는데, 베버의 정신주의적 경향에 대한 시마의 비판에는 침묵한 반면 법률합리화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 가져왔다. 배성룡은 베버를 법률합리화의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했다. 그는 베버를 통해 법률에 의해 매개되는, 추상적 개인이 모여 이뤄지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배성룡에게 베버란 개신교 윤리에서 기원한 자본주의 정신이 아닌, 개인과 사회를 매개할 공공정신을 주창한 사상가였다. 1950년대 배성룡이 베버를 수용하고 전유한 방식은 그가 식민지기 맑스를 이해한 방식과는 달랐다. 이는 식민지기와 1950년대의 차이는 물론, 도구로서 맑스와 베버가 갖는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배성룡의 지적 행보는 근현대 한국의 지식인이 숱한 구조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관심사를 이어가기 위해 어떤 전략을 펼치고, 사상가를 어떻게 도구로 이용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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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요약문)

This thesis seeks to critically review the history of ideology and research on intellectuals through Bae Seong-ryong’s intellectual journey. Bae Seong-ryong worked as a theorist of the socialist ideology group ‘Tuesday Society(Hwa-yo-p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 centrist politician who devoted himself to left-right cooperation and inter-Korean negotiations in the liberation space, and an intellectual of the Sasanggye who defended the values ​​of democracy and capitalism in the 1950s. Although he devoted himself to political movements and engaged in journalism and writing for such a long period, he failed to show any notable academic or political achievements. As a reflection of this, not many previous studies deal with Bae Seong-ryong, and even if there ar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liberation space, and the period after the 1950s have been approached in a segmented manner. This lack and discontinuity of prior research does not mean that Bae Seong-ryong is a figure unworthy of attention in the history of ideology. The fact that Bae Seong-ryong has not received attention so far can be evidence that the research on the history of ideology and intellectuals has been missing something. If we use as a criterion for judgment how intellectuals are classified according to grand ideologies such as liberalism, nationalism, and socialism, how “properly” a particular ideology or trend was understood, or how “original” interpretations and appropriations have emerged, we cannot properly understand intellectuals such as Bae Seong-ryong. He was a peripheral paragon who did not receive much attention then and now yet accounted for most intellectuals. Bae Seong-ryong’s interest was not in the nationalism, socialism, and liberalism fields that describe him today. Rather, the value that Bae Seong-ryong consistently pursu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o the 1950s was rationality. However, the nature of rationality that Bae Seong-ryong discussed changed considerably depending on the era, ideology, and structure. He remained an intellectual contributing to influential media representing his time by astutely rationalizing his idea of ​​rationality in accordance with these changes in times, ideology, and structure. Like most socialists in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Bae Seong-ryong also accepted socialism as an ideology of science and rationality in a loose relationship with various trends. This was also the position of the ‘Tuesday Society’, an ideological group where he worked as a leading theorist. However, Bae Seong-ryong’s thought about socialism as an early socialist was difficult to sustain for a long time because he had been rapidly immersed in Marxism since the early 1920s. In fact, Bae Seong-ryong was criticized by Yi U-jeok of ‘January Society(Il-wol-hoe)’ for being a secular Marxist. There was no place for Bae Seong-ryong in colonial Korea, where both academics and movements were based on how well one understood Marxism. After the liberation, Bae Seong-ryong participated in left-right cooperation and inter-Korean negotiations as one of the politicians of the Kim Kyu-sik faction. Still, when the division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became a reality, he changed his position to support the Republic of Korea. For Bae Seong-ryong, this was not a conversion or defection. In fact, he continued the social democratic or reformist orientation establish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ae Seong-ryong’s position was that the period of various possibilities under the military rule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had passed, and as the constitution and democratic system had been established, political movements should also follow suit. He was an intellectual who considered what he could do within the structure rather than questioning the structure itself. As the country and, in turn, its democratic order were established, albeit imperfectly, the rationality advocated by Bae Seong-ryong also moved from the level of spirit to the level of system. While worried about the ethics appropriate to the democratic system, he also questioned the rationality and morality of the system itself. In this process, Bae Seong-ryong mainly referred to Max Weber, who emerged as a social scientist in the free world after World War II. However, his understanding of Weber was different from contemporary trends such as anticommunism or the spirit of capitalism. He referred to Yasuhiko Shima(島恭彦), a financial economist of prewar Japan. Although silent on Shima’s criticism of Weber’s spiritualistic tendencies, he took Shima’s evaluation of Weber’s legal rationalization as was. Bae Seong-ryong shed new light on Weber from the perspective of legal rationalization. Using Weber as a medium, he imagined a society mediated by law and made up of abstract individuals. To Bae Seong-ryong, Weber was a thinker who advocated a public spirit that would mediate between individuals and society rather than a capitalist spirit that originated from Protestant ethics. The way Bae Seong-ryong accepted and appropriated Weber in the 1950s was different from the way he understood Marx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is reflected not only the difference between the colonial period and the 1950s but also the difference between Marx and Weber as tools. Bae Seong-ryong’s intellectual journey is an interesting example that shows what strategies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intellectuals develop to continue their unique interests amid numerous structural changes and how they use thinkers as to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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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1
Ⅱ. 정신의 '합리화': 일제 식민지기 배성룡의 지적 행보 6
1. 사상운동의 강조 6
2.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의 탈락 13
Ⅲ. 제도의 '합리화': 1950년대 배성룡의 지적 행보 23
1. 사상과 제도의 착종 23
2. 동양적 후진성 비판: 제도의 부재 30
Ⅳ. 이념의 '합리화': 1950년대 배성룡의 베버 수용과 전유 36
1. 배성룡의 베버 이해: 법률합리화 36
2. 배성룡의 베버 이해: '도의'의 재구성 42
Ⅴ. 맺음말 49
참고문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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