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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의 간도지역 선교활동과 문화운동 : 延吉敎區, 1921~1946

Missionary activities and the cultural movement of the Benedictines in Kando : Diocese of Yenki, 1921~1946

초록 (요약문)

20세기 초중반, 만주는 조선인들에게 ‘제2의 조선’으로 인식되었던 지역이다. 특히 재만조선인의 대다수가 밀집해 있던 간도지역의 개척사(開拓史)는 이 지역에 전래된 천주교회사와 긴밀히 연관되어있다. 이 논문은 1921년부터 1946년까지 간도에서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전개한 선교활동과 문화운동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베네딕도회는 1920년에 설정된 원산대목구를 위임받아 함경남북도를 관할하다가, 1922년부터 간도와 의란지역까지를 관할하게 되었는데, 간도지역에는 실질적으로 1921년부터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공동체 대상의 본격적인 사목이 이루어진 것은 1928년에 연길교구(연길지목구)가 원산교구(원산대목구)로부터 분립되어 간도지역을 관할한 이후부터였다. 연길교구는 1929년대부터 교세(敎勢)가 꾸준히 확장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1939년도 간도지역의 복음화율은 1,74%로 당시 조선 전체 7교구 중에서 가장 교세가 큰 교구였다. 이 과정에서 연길교구는 선교지의 상황과 특성을 고려한 간접선교를 전개하였는데, 특히 신자는 물론 외교인까지를 대상으로 교육 및 계몽운동과 출판활동에 주력하였다. 192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간도에서 실시된 근대교육은 그리스도교계에서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길교구의 각 본당 부설 해성학교는 간도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조선인 대상 그리스도교계 사립학교 중에서 학생수가 가장 많았던 학교이다. 베네딕도회의 교육활동은 먼저, 조선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식민지상황에서 지역민들의 서구 근대문화와 모국어 교수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여 시작된 활동이었다. 연길교구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에서는 성경과목을 비롯하여 모든 교과목을 각 민족의 모국어로 가르치면서 신교육과 신문화 교수를 통해 근대적 가치관을 지닌 그리스도교인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종교교육을 통하여 지육·덕육(智育·德育)을 병행하는 교육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인 학부모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만주국 시기에 남성들과는 상대적으로 보통학교의 취학률이 낮았던 여성들의 교육은 보통학교 부설 보조교육기관에서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에 진출한 선교회 중에서 보조교육기관을 운영한 단체는 베네딕도회 뿐이었으므로 간도지역 조선인 여성들의 보통교육은 베네딕도회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에 모든 재만조선인 보통학교와 보조교육기관은 일제의 직·간접적인 통제 하에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 각 본당 관할 해성학원에서 실시된 여성교육은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 성별, 연령, 혼인여부, 직업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그룹별로 이루어졌다. 교육연한은 크게 조선어와 산술을 위주로 가르치는 단기교육과 2~3년제로 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육내용도 수강자들에게 실질적인 교과목으로 편성하여 교수하였다. 여성교육의 목적은 실업교육을 통하여 여성들이 직업을 얻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나아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동시에 비신자 여학생들은 물론 이들의 지인,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에게 미치게 될 선교의 영향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여성인재의 양성은 현지인 수녀의 양성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연길교구는 이들의 고등교육을 지원하면서 선교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과목을 교수할 교원으로 양성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연길교구는 이와 같은 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가톨릭 운동을 추진하여 간도지역에서 신자들 간의 결속과 연대를 도모하고 나아가 이들을 교육시켜서 적극적인 전교사업을 펼치고자하였다. 특이할 만한 것은 17세 이상의 청년신자들 중심의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성화시킨 것인데, 이는 당시 조선 천주교회가 청년회를 국가와 사회활동의 중심이 되는 단체라고 인식한 데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을 위하여 교리연구와 강연회를 열었고, 문맹 퇴치 운동과 자선사업 등을 함께 추진하였다. 16세미만의 소년소녀들이 중심이 된 소년운동은, 먼저 성체공경(聖體恭敬), 전례운동(典禮運動), 덕행수행(德行修行) 그리고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타르치시오회(Tarsitiusvereins)라는 소년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3차례의 소년대회는 이 교구의 전례운동을 추진하는데 있어 중심단체인 타르치시오회, 데레사소녀회, 세시리아소녀회, 그리고 그밖에 해성학교에 조직된 소년소녀단체와 덕원신학교 신학생들과의 연합으로 개최된 ‘성탈시시오연길연합대회(聖탈시시오延吉聯合大會)’이자 ‘전간도가톨릭소년회연합대회(全間島가톨릭少年會聯合大會)’였다. 연길교구의 소년운동과 소년연합회는 독일의 전례운동에 당시 서구 가톨릭 소년운동의 큰 흐름인 가톨릭 스카우트(Scouts) 운동과 성체십자군(聖體十字軍) 운동의 성격을 가미하여 발전시켰으며, 국제성체대회의 모습을 차용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연길교구가 이 소년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1931년부터 발간한 회보(會報)는 1936년 4월에 창간된 조선교구 가톨릭 소년운동 기관지 󰡔가톨릭少年󰡕의 전신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아동월간잡지는 조선 국내외 모든 아동들을 대상으로 발간되어 연길교구가 추진한 전례운동의 전개범위를 확대하여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간도에서 전례운동의 의의는 먼저, 모국어를 사용하여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전례를 중심으로 사제와 평신도간에 상하 위계적 관계를 벗어나 수평적이며 더욱 각별한 관계가 형성된 측면을 들 수 있다. 나아가 일제강점기에 ‘꿈을 이룰 기회의 땅’을 찾아 이주한 재만조선인들이 독일 선교사들의 전도로 받아들인 서구 종교를 통해 단합을 도모하고 정체성을 보존할 구심점을 마련하게 된 민족 간의 유대 및 연대가 형성된 측면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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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요약문)

In the early and mid-twentieth century, Manchuria(滿洲) was a region recognized as the second Korea for Koreans. In particular, the history of the great clearings of Kando(間島), where most of the Koreans were concentrated in the areas of Manchuria, is closely linked to the history of the Catholic introduced to this region.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first to research the content and character of the missionary activities and cultural movement that the Benedictines had carried out for the Koreans from the year 1921 to the year 1946. and then is to reveal the value of a fact. The Congregation of the Missionary Benedictines of St. Ottilien had been managing the Hamhung region of the Apostolic Vicar of Wonsan since 1920. Then from the year 1922, it included the Manchuria and Ilan region. Its first goal was to lead the Korean faithful who lived in this region. Rather, these activities have been initiated since 1928 when the Apostolic Prefect of Yenki was divided over the Apostolic Vicar of Wonsan, and developed since this Apostolic Prefect took charge of the Kando region. This diocese developed continuously from 1929, the percentage of evangelization in the Kando region in 1939 was 1.74%. It was the strongest of seven Korean dioceses. During this period, the Benedictines chose the way of indirect evangelization. The Benedictine monks chose the indirect way of evangelization during this period, which included the construction of the buildings around their abbey, which was the base of their activities, the education project, the charity work, the medical services and the publishing project, etc. The Benedictine monastery was the most popular in the country. This project of Culture targeted the faithful and also the pagans. From the early 1920s to the mid-1940s, modern education impelled in Manchuria, Christians led it. Their mission schools have taught the most number of students of any other western mission school in Kando. Their educational activities were like something of a philanthropic enterprise. Because they started by accepting the request of local people to teach them for literacy. In the missionary schools of the Diocese of Yenki, the missionaries taught all the disciplines and the Bible in Korean. They hoped to cultivate Christians with modernized value judgment through modern educations and through their teachings of modern culture. According to the educational policy of protecting children from communist ideology, the Benedictines chose an educational way to go hand in hand with the teaching of intellectual knowledge and with moral education. This is the reason why the Benedictine missionary schools were able to obtain the favor of the parents of Korean pupils. Most of the education of Korean women in the period of the Manchurian (Manchoukouo) dynasty was carried out in subsidiary bodies which were installed primary schools. And among the missionary associations of Manchuria, only the Benedictines administered the subsidiary bodies. It is therefore presumed that the education of Korean women in Kaodo was obtained through Benedictines. During this period, all Korean primary schools and subsidiary organizations in Manchuria were under the direct and indirect control of the Japanese government. In this situation, the education of Koreans has been carried out in various groups. That is to say that we considered their various situations such as sex, age, marriage or single, character of their professions, etc. The years of schooling consisted of the system of short-term education and that of two or three years. According to these systems, the contents of education are also composed on practical disciplines for Koreans. The purpose of this education, to have the profession so that they have the capacity to be economically independent. Finally, for their social positions to improve. At the same time, the Benedictines have aimed evangelization on women who are not Catholic and their friends, parents, brothers and sisters, husbands, children. The formation of women's talent includes even that of Korean nuns. The diocese of Yenki by supporting their higher education, was in the process of moving forward to train female teachers who will teach all disciplines including that of religion. At the same time, this diocese introduced and deployed the Catholic Action so that their faithful would be united in the face of the anti-communists and counter-Catholicism. It wanted to develop the project of evangelization by educating especially the young. This diocese is particularly interested in young people over the age of 17. And it wanted to organize a youth association. This began with the Korean Catholic Church's understanding that this association is at the centre between the state and society. For this movement, he organized the study of doctrine and the conference on Catholicism. It has also launched the struggle against illiteracy with their Culture Project. The diocese of Yenki organized ‘Tarsitiusvereins’ with the aim of training native priests and respecting the Eucharist, the liturgical movement and asceticism for virtuous conduct. The three congresses of children's groups from the year 1931 to the year 1936, they were the cogres of the Federation of Tarsitiusvereins of Yenki and at the same time the congress of the federation of children of the whole Kando. The peculiarity of the movement and the congress of the children of this diocese, during the liturgy movement of Germany in Manchuria. The missionaries introduced into this movement the character and spirit of Catholic Scouting and of the Eucharistic Crusade in Europe which were supported by the Pope. At the same time, from 1931, this diocese published a magazine to energize groups of children. Then he received a request to publish the official organ of the Diocese of Korea. And he founded it in the name of the Catholic Child from 1936. This magazine, which was published for all children in Korea, has had a great role in developing a field for the deployment of the movement of this Diocese throughout Korea. The importance of this movement in Manchuria, first, it is to have participated more actively in the liturgy by using the native language (Korean), at the same time it is to have formed a horizontal and more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the priest and the layman around the liturgy. Second,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e Korean peoples who immigrated to Manchuria in search of "the land of a new chance" found a way to keep their identity in the Western religion (Catholicism) they welcomed by the evangelization of German Missionaries. And they gathered there and formed the bond and the union between the peo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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