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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동방의 프랑스인’ : 레바논 마론파와 프랑스의 기억

Invented 'Français de l'Orient' : Memories of Lebanese Maronites and France

초록

This paper studies the identity of the ‘Français de l'Orient’, invented by the Lebanese Maronite intellectuals and the French Romantic intellectuals in the 19th century. The downfall of Mehmed Ali Pasha in 1840 and the banishment of Bashir Shihab II triggered a crisis of the Maronite church which had political, social and religious ties with the Shihab amir, the political leader. The Maronite Church had to enlist the help of Western powers to restore the Sihab dynasty. It was France that responded to the request of the Maronite Church. Instead of the Holy See, France claimed to be the protector of Catholics within the Ottoman Empire. After the defeat of Mehmed Ali by the Ottoman Empire and Allied forces, France was also on the verge of losing its influence over Syria. In the midst of such a crisis on both sides, the Maronite Church and France discovered each other. They strove to invent an imaginary identity called 'Français de l'Orient' by using the common history of the 'Crusade'. Maronites, who had constructed a Christian state in the Levant with the French, were described as 'Crusaders of the East'. In other words, Lebanese Maronites were reborn as the brothers of France who were inseparable culturally, religiously, and historically. However, such religious discourse on the Crusades ignored other factors in the conflict in Mount Lebanon, resulting in 'sectarianization' or 'religionization'. After the exile of Bashir II, the conflict lasting from 1840 to 1860 occurred between the Shihab Amir and the feudal nobility, or between the lords and the commoners. Nevertheless, the political and social factors of the discords were excluded and the events were transmitted to the Western world simply as a sectarian conflict. In addition, this led to military intervention by France and Western powers in 1860, as well as the establishment of a special autonomous province, or Mutasarrifiyya, under the Christian pasha in 1861. After the Ottoman Empire was defeated in World War I, Mutasarrifiyya was reborn as Greater Lebanon, including coastal cities and fertile plains. The duty of France to protect ‘Français de l'Orient’ led to the establishment and mandatory rule over Lebanon. Therefore, this paper intends to assert that the 'Français de l'Orient' is a fictional entity created by the Maronite Church and France for their political necessities, and was taken advantage of French colonization of Syria and Leb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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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19세기 레바논의 마론파(Maronite) 지식인들과 프랑스 낭만파 지식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동방의 프랑스인’ 정체성을 탐구한다. 1840년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Mehmed Ali Pasha)의 실각과 마론파 바시르 2세(Bashir Shihab II)의 추방은 시하브 아미르(Shihab amir)와 정치적·사회적·종교적으로 결속되어 있던 마론파 교회의 위기를 야기했다. 마론파 교회는 시하브 왕조를 복원시키기 위해 서구 열강에게 도움을 구해야만 했다. 이때 마론파의 요청에 응답한 것은 로마의 교황청 대신 가톨릭교도들의 보호자를 자처한 프랑스였다. 프랑스 또한 메흐메드 알리의 실각 이후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양측의 위기 속에서 마론파 교회와 프랑스는 서로를 발견했다. 그들은 공통의 역사인 ‘십자군’ 담론을 이용하여 ‘동방의 프랑스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마론파는 프랑스와 함께 레반트에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이슬람에 맞서 싸운 ‘동방의 십자군’으로 묘사되었다. 즉, 마론파는 문화적·종교적·역사적으로 끊어질 수 없는 프랑스의 형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십자군 담론은 레바논 산지 갈등의 다른 요인들을 무시하고, ‘종파화’ 또는 ‘종교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시르 2세의 추방 이후 1840년부터 1860년까지 이어진 충돌은 시하브 아미르와 봉건 귀족, 또는 영주와 평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었으나, 사건의 정치 및 사회적 요인들은 배제된 채 단순히 종파 간의 갈등으로 치환되어 서구 세계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이는 1860년 프랑스 및 서구 열강의 군사적 개입과 1861년 기독교 총독 치하의 특별자치주 무타사르리피야(Mutasarrifiyya)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무타사르리피야는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해안 도시들과 평야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의 위임통치령 대레바논(Greater Lebanon)으로 다시 태어났다. ‘동방의 프랑스인’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 의무는 레바논의 수립과 위임통치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마론파 교회와 프랑스가 정치적 필요로 만들어낸 ‘동방의 프랑스인’이라는 허구적 실체가 시리아 및 레바논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화에 동원되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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