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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하버마스 네트워크의 형성과 해체 : 딜레탕티즘과 학술적 도구주의는 어떻게 하버마스 수용을 실패하게 만들었는가

The Formation and Deformation of Habermas Network in the 90s: How Dilettantism and Academic Instrumentalism made Failure on the Reception of Habermas?

Abstract

1990 년대 중반 한국 인문사회과학 학술계에는 ‘하버마스 열풍’이 불었다. 이 시기 연구자 학생, 교양 대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하버마스에 주목하고 그를 알고자 했다. 열기는 1996 년 하버마스의 방한 행사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방한 행사의 종료 직후 열풍은 빠르게 식어갔고, 하버마스에 대한 관심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이 하버마스 수용 과정에서 일어난 90 년대 열기와 급격한 냉각 현상을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통해 지식사회학적으로 분석했다. 필자는 하버마스 열기의 고조와 냉각이 동일한 원인, 즉 부르디외가 친밀한 적대자로서의 학술 공동체 형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비판한 실천 성향이자 80~90 년대 국내 학술영역의 안팎에서 지배적이었던 딜레탕티즘과 학술적 도구주의의 결과임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 하버마스 열기는 한 편에서 넓고 얕은 연구를 통해 자신의 학술영역 내 위치를 재생산 하고자 했던 주류 제도권 학자들, 다른 한 편에서 사회이론을 정치사회적 변혁을 위한 도구로 삼고자 했던 비주류 학술운동 출신 학자들, 그리고 양 극단 사이에서 제3의 지대를 창출하고자 했던 신진 하버마스 전문 연구집단의 일시적 연대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적 세 집단들 사이 약한 연대는 네트워크의 완성과 동시에 주류 학자들의 딜레탕티즘과 변혁주의 학자들의 학술적 도구주의의 재가동으로 인해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 사이에서 양측의 성향에 모두 영향을 받으며 부동했던 신진연구집단이 분열하면서 네트워크가 해체된 결과가 바로 하버마스 인기의 추락이자 수용의 실패였다. 필자는 이러한 하버마스 수용 과정을 추적하여 보여준 뒤, 이 현상이 국내 인문사회과학 학술영역의 서구이론 수용과 서구종속성 관련 논의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탐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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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 the mid-1990s, the "Habermas fever" blew in the academic sphere of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in South Korea. During this time, almost all researchers, students, and the public were interested in German theorist Jürgen Habermas and wanted to know him. The fever peaked at Habermas' visit to Korea in 1996. However, after the event, the craze quickly cooled, and every attention in Habermas faded away. This study sociologically analyzed the rapid rise and fall of Habermas in the 90s reception process through the Pierre Bourdieu's field theory. I showed that the causes of escalation and cool down of the “Habermas fever” were the same, that is, the result of dilettantism and academic instrumentalism, which were criticized by Bourdieu as disturbing the formulation of the so-called friendly hostile research group, and were dominant practical dispositions inside and outside of academic sphere in the 80s-90s’ Korea. Specifically, the Habermas fever was a result of the coalition among the mainstream scholars who wanted to reproduce their position in the academia through wide and shallow research, and the outside reformists from the intellectual movement who wanted to make socio-political transformation through the social theory, and the rising specialized Habermasian research group who tried to balance between formers. However, weak solidarity among these three heterogeneous groups began to diverge as soon as the network had completed, due to the reactivation of dilettantism of mainstream scholars and the academic instrumentalism of reformist scholars. And finally, the network collapsed due to the split of Habermasian research groups influenced by both sides' tendencies and this led to the radical fall of popularity of Habermas and caused the failure of reception. After tracking this reception process of Habermas in Korea, I discussed what this phenomenon would mean in the critical discourse of reception of foreign theory and the academic western dependency of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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