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초 薛罽頭 연구
Study on Seol Gye-Doo(薛罽頭) in the early 7th century
- 주제(키워드) 설계두 , 열전 , 의관자손 , 골품제 , 입당 , 모병 , 주필산 전투 , 추증 , Seol Gye-Doo(薛罽頭) , Yeoljeon(列傳) , A descendant of Ui-gwan (衣冠子孫) , Silla Golpum system(骨品制) , Entering into Tang(入唐) , Recruitment(募兵) , Battle of Jupilsan(駐蹕山 戰鬪) , the posthumous conferment of honors(追贈)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조범환
- 발행년도 2021
- 학위수여년월 2021.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UCI I804:11029-000000066195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본 논문은 7세기 초에 활동한 신라인 薛罽頭의 행적을 다룬 것이다. 설계두 열전은 『三國史記』에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는 설계두와 관련된 사료가 전무한 실정이기에 지금까지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三國史記』에 수록된 열전 원문부터도 상세히 검토된 바가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설계두 열전 기록을 우선 중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설계두 열전에서 시점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부분은 입당 시기인 621년과 駐蹕山 戰鬪에 참여한 645년의 일뿐이다. 이 때 과정이나 동기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다. 이를 7세기 초 당과 신라의 정세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먼저 열전 서두에 쓰인 ‘亦 新羅 衣冠子孫’이란 표현을 해석해 보면 설계두는 의관제 규정의 적용을 받는 두품층에 속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6두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관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진골이 아니기 때문에 출사하고자 하였을 때 한계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열전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설계두는 왕을 보필할 정도의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소원했다고 하였다. 그만큼 진평왕대 정국에서 설계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출사하려면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이러한 두품층 출사 정황과 관련해서는 화랑도의 낭도로써 양명한 劒君과 惠宿의 일화가 참고 된다. 이에 설계두는 입당하여 당의 무관직인 左武衛果毅를 수여받았다. 열전에서는 단순히 ‘자천하여 나아갔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보다 면밀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때 이전 왕조인 수대에 고구려 원정을 위해 모병한 이들 가운데 용맹함과 공훈을 인정받아 특별히 발탁된 ‘驍果’의 존재가 주목된다. 또한 당 전기에도 과의가 공훈에 대한 포상으로서 다수 제수되었다. 그렇다면 설계두 역시 군 모집에 응한 후 일정한 공훈을 세워 좌무위과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좌무위과의로서 설계두는 645년 安市城 남동쪽에서 발발한 주필산 전투에서 적진으로 돌격하여 일등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이 때에 대장군 추증 사실과 관련하여 열전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당 측과 설계두 개인의 의도를 각각 유추해보고자 하였다. 우선 당 태종은 이민족이자 맹장인 설계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추모함으로써, 당에 귀부하여 헌신한 이들에게는 그에 걸맞게 대우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였다. 이로써 저항하는 고구려군이 내투해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때 당 태종은 설계두를 正3品 大將軍으로 추증해 주었는데, 당대에 勳官 수여가 일반적이었던 사실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추증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또한 설계두 본인은 친위군인 6군 소속이었다고 해도 눈에 띄는 지위는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높은 공훈으로써 이를 초월하기 위한 의지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설계두는 이른 시기부터 신라 골품제를 비판한 흥미로운 인물인 한편, 입당해서 당의 무관직을 제수 받고 사후에는 대장군에 추증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또한 당-삼국 간 대립이 본격화되기 전인 7세기 초 동아시아 정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로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일찍이 이민족 출신으로 당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동시대의 번장이나 후대의 고구려·백제 유이민의 선례쯤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계두의 입당은 무엇보다 골품제 모순에 저항해 당당하게 출세하고자 하는 적극적이며 개인적인 동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more초록/요약
This paper examines the activities of Sillain(新羅人) Seol Gye-Doo(薛罽頭), who lived in the early 7th century. Other than a record of Seol Gye-Doo is provided in the Samguksagi(三國史記), there are extremely few historical data related to Seol Gye-Doo. Thus there has been no active discussion up until today. On the other hand, the original text of Biography(Yeoljeon, 列傳) has not been reviewed in detail and therefore, this paper will focus on Seol Gye-Doo Yeoljeon first. The only specific dates mentioned in Seol Gye-Doo Yeoljeon is that he left for Tang(唐) in 621 and died in the Battle of Jupilsan(駐蹕山 戰鬪) in 645. There was no further comment on the process or motive. This is observable through the state of Tang and Silla in the early 7th century. First, the expression 'A descendant of Ui-gwan(衣冠子孫)' used at the first sentence of Yeoljeon, implies that Seol Gye-Doo most likely belonged to Dupum class(頭品層)-especially Six Dupum(6頭品)-and was subjected to the rules of Ui-gwan office system(衣冠制). However, despite being a descendant of Ui-gwan, Seol Gye-Doo was not Jingol(眞骨), so it can be inferred that he had a limit when he applied for an official post. In particular, according to the description of the Yeoljeon, Seol Gye-Doo wanted to rise to a high-level position to guard the king. In order to get the position in the political turmoil of King Jinpyeong(眞平王), many challenges would have followed. In regards to the Dupum class's entering for government office, the anecdotes of Keomkun(劒君) and Hye-suk(惠宿) can be referenced. Thus Seol Gye-Doo entered into Tang and was awarded Jwamuwigwaui(左武衛果毅), which was a military officer ranking of Tang. Although in his biography it is simply mentioned to have ‘self-recommended to a post’, this requires a more in-depth interpretation. At this time, it is noteworthy that 'Hyogwa(驍果)’ was specially selected in recognition of their bravery and merit among those enlisted for the expedition of Goguryeo(高句麗) in the previous dynasty, Sui(隋). Also, gwaui(果毅) was often offered as rewards for meritorious service in early Tang dynasty. Deducting from this, it seems that Seol Gye-Doo also became a officer of the Jwamuwi-army after joining the recruitment and having made certain achievements. In 645, in the Battle of Jupilsan which took place in southeast of Ansi Fortress(安市城), Seol Gye-Doo marched into the enemy's camp as a Jwamuwigwaui, and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hough he died in action. This paper intends to deduct the intentions of the two individuals, Tang and Seol Gye Doo, regarding the posthumous conferment of honors of ‘Great general(大將軍)’, which were not revealed in Yeoljeon. First of all, Tang Taejong(唐 太宗) tried to show how he treat people who surrender and devote themselves for Tang by actively commemorating the death of Seol Gye-Doo, a foreign general, expecting the Goguryeo army to surrender. Tang Taejong honored Seol Gye-Doo as the Great general which was Jeongsampoom(正3品). Considering the fact that receiving Xunguan(勳官) was more common at that time, such an award was an unconventional measure. Also, even if Seol Gye-Doo was a member of the 6gun(6軍) which was the emperor's guard, he was not in a prominent position. So it seems to be the result of his will to transcend this as high merit. In conclusion, Seol Gye-Doo is an interesting figure who criticized the Silla Golpum system(骨品制) in early time. He was also a historical figure who entered into Tang and received the military post of there and was ranked in the Great general after death. He is also noteworthy as a figure who shows a side of the situation in East Asia in the early 7th century, before the confrontation between Tang and Three Kingdoms(三國) in earnest. He was an early immigrant, and had some success in Tang. Therefore he could be merely seen as an unprecedented example for the contemporaries foreign general, or for the later immigration cases from Goguryeo and Baekje. However, Seol Gye Doo’s entry into the Tang dynasty is quite significant in the sense he brought an active and personal motive to resist the contradiction of the Silla Golpum system and to succeed through his capabiliti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