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승가에 대한 프랑스 식민정부의 통제와 승가의 대응 : 1916년 승려의 신분증 발급 및 이동에 관한 법령을 중심으로
The French colonial government's control of the Theravada Buddhist Sangha in Cambodia and the response of the Sangha:Focusing on the 1916 Act on the Issuance of ID and Movement of Monks
초록/요약
본 연구는 프랑스 식민정부가 1916년 공포한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승려의 신분증 발급 및 승려의 이동에 관한 감시와 보고 등을 내용으로 한 법령을 실증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식민정부의 입장에서 바라본 통제정책과 그에 따른 승가의 대응을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오래전부터 캄보디아의 불교 승가는 캄보디아의 전통사회를 구성하는 축의 한 부분을 맡아오고 있었다. 왕을 포함한 재가와 승가로 나뉜 캄보디아사회는 공덕사상을 매개로 상호연대하고 있었으며 유기체적인 연결을 유지해왔다. 식민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역할과 위치에 있는 승가를 그들의 식민지배를 방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였다. 승가는 식민지배 초기 비록 조직적인 참여는 아니었지만 개별적인 승려들이 반식민저항운동에 관여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식민정부가 승가를 주목한 것은 캄보디아 왕실과 승가에 대한 태국의 영향력이었다. 19세기 중반 시암의 몽꿋왕에 의해 본격화된 불교 개혁운동은 캄보디아에 탐마윳 종파를 소개하고 캄보디아 불교 개혁운동을 자극하였다. 이는 식민정부가 승가에 대한 의심을 통제하려는 행동으로 옮기게 하였다. 식민정부는 1916년 3월 18일 법령을 공포하면서 서문에 승가의 고결한 명성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법령은 총 12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승려의 신분증에 관련된 조항은 1번부터 3번까지 이며 나머지 조항은 승려의 이동에 관한 조항이다. 조항들 중에는 메쿰의 역할이 자주 언급되었는데 승려 후보자에 대한 심사부터 승려들의 이동을 감시하며 보고하는 임무였다. 메쿰은 지방행정체계의 가장 낮은 단위인 쿰의 수장으로서 프랑스 식민정부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서 정착시키려 했던 근대지방행정체계의 상징과 같다. 식민정부가 1916년의 법령을 제정한 의도는 승가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행정제도개혁을 서두르려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법령을 제정하기 전1915년 프랑스인 고등주재관인 프랑소와 마리우 보두와(François Marius Boudoin)는 각 지방주재관과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승가의 두 종파인 모하니까이와 탐마윳의 승왕에게 법령 초안을 보내 그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프랑스인 식민관리들은 몇 가지 제안과 함께 법령의 제정에 동의와 환영을 표했다. 반면에 고등주재관에 보낸 승왕들의 공문서에 따르면 법령의 내용중 승려의 수계식에 관련된 조항들이 승가의 오랜 전통과 경전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염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법령을 제정 할 때 승가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법령을 제정한 이후 집행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승려들의 반응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법을 제정한 이후 5년이 지나서 1921년 고등주재관은 법의 집행에 대한 전국적인 점검에 들어갔는데 캄보디아인 관리들의 태만 또는 일부 승려들의 간과가 있었지만 대체로 법은 잘 적용되고 있다고 식민정부는 공문서에 보고하였다. 식민정부가 승가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법령 임에도 불구하고 승가가 보여준 대응은 저항 보다는 암묵적 동의와 소극적인 협력이었다. 태국 불교로 부터 오는 영향을 포함한 식민시대 도래라는 큰 변화를 승가가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앞으로 캄보디아 승가의 유지와 발전을 가늠하는 중대한 잣대가 되었다. 신분증인 차야를 수용하고 수계식에 국가가 개입하도록 허용함은 결국 근대 국가의 감독 아래 제도화 되어져 가는 승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more초록/요약
This study is an empirical study and analysis of laws and regulations promulgated in 1916 by the French colonial government on the issuance of ID cards for Buddhist monks in Cambodia and monitoring and reporting on the movement of Buddhist monks. The goal was to find out the Sangha's response. Long before France ruled Cambodia as a colony, Buddhist Sangha in Cambodia had been playing a part in the axis of Cambodia's traditional society. Cambodian society, which was divided into the royal family and the monks, including the king, had been in solidarity with each other through the ideology of meritoriousness and had maintained an organic connection. The colonial government regarded the Sangha in this role and position as a potential threat that could hinder their colonial rule. In the early days of colonial rule, individual monks were involved in anti-colonial resistance movements, although they were not organized. Above all, what the colonial government paid attention to was Thailand's influence on the Cambodian royal family and the monks. The Buddhist reform movement, initiated in earnest by King Mongkut of Siam in the mid-19th century, introduced the Tammayut sect to Cambodia and stimulated the Cambodian Buddhist reform movement. This led the colonial government to take action to control suspicions about the Sangha. The colonial government promulgated a decree on March 18, 1916, and in the preface, it was argued that the law was enacted to prevent damage to the noble reputation of the Sangha. He argued that the law was enacted to prevent damage. The statute consists of a total of 12 articles. The articles related to the monk's ID are numbered 1 to 3, and the remaining articles are the articles on the movement of the monks. Among the articles, the role of Mekhum was frequently mentioned, from the screening of candidates for monks to monitoring and reporting on the movements of the monks. Mekhum is the head of Khum, the lowest unit of the local administrative system, and is like a symbol of the modern local administrative system that the French colonial government tried to establish for effective colonial rule. The intention of the colonial government to enact the decree in 1916 raises suspicions that it was not only to control the Sangha but also to hasten administrative reform. Before enacting the decree, in 1915, the French High Commissioner François Marius Boudoin sent a draft decree to each regional governor and to the Sangha of the two sects of the Cambodian upper-left Buddhist sects, Mohanikai and Thammayut, to share their opinions. French colonial officials agreed and welcomed the enactment of the decree with several proposals. On the other hand, according to the official documents of the monks sent to the High Commissioner, concerns were expressed on the grounds that the provisions related to the ceremonies of the monks in the contents of the statute damage the old traditions and scriptures of the monks. However, the opinions of the Sangha were not reflected when the statute was finally enacted. In the process of enacting the enactment and then enforcing it, the monks' reactions varied slightly depending on the region. In 1921, five years after the law was enacted, the High Commissioner went into a nationwide inspection of the enforcement of the law reported. Despite the fact that the colonial government made a decree to control the Sangha, the response the Sangha showed was tacit consent and passive cooperation rather than resistance. How the Sangha accepts the great changes of the colonial era, including the influence of Thai Buddhism, has become an important criterion for judging the maintenance and development of the Cambodian Sangha in the future. Accepting the chaya, an identification card, and allowing the state to intervene in the ceremonies is ultimately to accept the Sangha, which is institutionalized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modern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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