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 최완사건 및 서여서도사건 재고
Reconsidered the case of Choiwan and Seoyeoseodo island during the Sejong period
- 주제(키워드) 최완사건 , 서여서도사건 , 계해약조 , 고초도조어금약 , 세종 , 조일관계 , 조선전기 , 문인제도 , Choiwan case , Seoyeoseodo island case , Gyehaeyakcho , The king Sejong , Gochodo island fishery treaty , The Joseon and Japanese relationship , the early Joseon period , Munin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 지도교수 계승범
- 발행년도 2020
- 학위수여년월 2020.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 UCI I804:11029-000000065452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조선전기 대일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구금압(倭寇禁壓)이었다. 고려 말부터 한반도를 위협한 왜구를 억제하기 위해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고 일본에 사절을 보내 금압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의 이런 노력에도 왜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은 왜구의 침략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1419년(세종 1) 강화한 수군으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후 왜구는 통교자로 전환되었고, 조선은 회유책을 바탕으로 한 왜인통제책을 정비해갔다. 세종은 태종의 왜인통제책을 계승하고 체계화했다.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서계(書契)와 도서(圖書)제도를 확대했다. 또한 지속적인 대일사절을 파견해서 일본사정을 고려한 대일정책을 세웠다. 세종의 노력으로 조선과 일본은 평화로운 통교를 이어갔다. 하지만 1430년대 일본의 내전과 대마도의 연이은 기근으로 통교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선은 도항한 대일통교자를 사절로서 대우해서 체재비를 모두 지급했다. 그래서 통교건수와 통교자 수의 급증은 치안을 불안하게 하고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세종은 무분별한 통교자의 도항을 막기 위해서 모든 왜인통교자가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소지해야 도항을 허가하는 문인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대마도기근이 왜구 출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고초도조어금약(孤草島釣魚禁約)을 맺었다. 조어금약을 통해 그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어업활동범위를 삼포주변에서 고초도 주변까지 넓혀주었다. 고초도는 정확한 위치를 확정 할 수 없지만, 남해안 손죽열도로 추정하고 있다. 조어금약은 문인제도를 바탕으로 실시되었으며『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어금약(釣魚禁約)’을 통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조어금약을 실시하고 초반에 발생한 일어난 두 가지 위반사건은 대일외교 정비과정에서 매우 흥미롭다. 1442년 10월 최완사건(崔浣事件)과 1443년 6월에 일어난 서여서도사건(西餘鼠島事件)으로, 조선은 두 사건을 통해 계해약조를 맺고 대일통교체제 기초를 확립했다. 계해약조는 조선전기 대일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정약과정에서 주체적인 역할은 한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과정으로 약조가 맺어졌는지에 대한 연구까지 이루어졌을 정도로 중요한 약조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계해약조를 맺을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 본 연구는 최완사건과 서여서도사건을 중심으로 조선전기 대일통교체제의 기초 확립 과정을 알아볼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 소홀했던 두 사건을 재고함으로써 세종의 대일정책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조선전기 대일관계를 사건별로 살펴보는 연구가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more초록/요약
The most important diplomatic issue with Japan was to prevent Japanese pirates who called 'Waeku' in the early Joseon period. WaeKu had threatened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end of Goryeo period. Joseon trained a powerful navy and requested Japan control them. But they didn't stop looting near shore. this is the reason why Joseon attacked Tsushima ialand where Waeku lived with well-trained navy in 1419. Joseon won and these counrties should make an effort to build better relationship. The King Sejong of Joseon Dynasty opened three ports where they are near Japan to allow to trade. Also he implemented ‘Seogye(書契)’ and ‘Doseo(圖書)’ systems which were similar to the visa. Futhermore he sent envoy to Japan frequently and improved systems toward them. However, Japan was disordered by civil war and famine in 1430s. Many Japanese envoys visited to demand foods and helps. Sejong tightened up on visa system which called ‘Munin(文引)’ to control too many Japanese coming to Joseon. Also he allow for them to fishery in Joseon's ocean to solve Tsushima famine. They conclude a treaty that called ‘Gochodo island fishery treaty(孤草島釣魚禁約)’. After the treaty, two violation cases are interesting. one is 'Choiwan case(崔浣事件)' what occurred in October 1442 and the other is 'Seoyeoseodo island case(西餘鼠島事件)' what did in June 1443. Joseon investigated these cases strictly. Through these violation cases, Joseon could get dominance relationship and sign a treaty which called ‘Gyehaeyakcho(癸亥約條)’. This treaty has a meaning of completion basic of diplomatic relation with Japan. Gyehaeyakcho is truly important about the Joseon and Japanese relationship in the early Joseon period. But What was the cause is not popular. This study focuses on two cases. Also I try to find out what was the cause of the treaty and what are the meaning of these cases about the Joseon and Japanese relationship. I hope many people can understand much easily diplomatic relation between these countries through this study. Furthermore I wish many studies are came out continuously about this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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