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

17세기 朝鮮의 對淸 자세 : 郊迎을 중심으로

The Attitude of Chosǒn towards Qing: Receiving Rituals towards the Imperial Envoy in 1637~1674

초록/요약

This paper examine the attitude of the Chosǒn Dynasty towards Qing Dynasty through a receiving ritual named gyoyeong. Receiving rituals towards the imperial envoy are important as they imply the receiving country’s attitude to the empire. Chosǒn considered Qing as barbarians. However, Chosǒn had to succumb to Qing since 1637. The question remains in this point: As the manuals were not exactly performed in reality, would there had been any possibilities for Chosǒn to be disloyal to the receiving ceremony? Therefore, the actual cases of gyoyeong, which could reveal Chosǒn’s superficial attitude towards Qing, has to be analyzed. This thesis claims that this is proven by the data of Chosǒn’s gyoyeong which shows that there was a special tendency in the seventeenth century. While kings in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performed gyoyeong steadily, kings in the seventeenth century didn’t. Omitting and fulfilling aspects in gyoyeong was repeated in this era. The tendency of gyoyeong in each reigning period resulted from Chosǒn's domestic situations or external reports. Also, since the king of Chosǒn had no authority to exempt gyoyeong, the imperial envoy was a decisive factor in omitting gyoyeong. Gyoyeong in the seventeenth century shows that there were a lot of factors that influenced the receiving rituals. This implies that there could be more other cases, that shows Chosǒn’s apparent attitude towards Qing.

more

초록/요약

과연 朝鮮은 원치 않았던 淸나라 사신 영접의례에 성실한 자세로 임했을까? 본고의 주제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신 영접의례는 사신 측 국가에 대한 맞이하는 국가의 자세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영접의례의 매뉴얼은 국가에서 편찬한 의례서에 수록하고 있지만, 맞이하는 국가의 자세를 보다 실질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례를 시행한 실제 사례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는 청나라 詔勅使 영접의례 중에서 대표적 의례인 郊迎과 그 실제 사례들에 주목하였다. 丁丑約條 이후 250년간 청나라 조칙사에 대한 조선 국왕의 교영 사례들을 데이터로 정리해보았다. 분석 결과, 유독 17세기 중반에 특이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19세기에는 조선 국왕이 꾸준히 교영을 이행한 반면, 17세기에는 지속적으로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기간, 꾸준히 시행하는 기간, 시행과 미시행 사례들이 혼재하는 기간이 있었다. 각각의 기간들은 인조, 효종, 현종의 재위기간과 일치했다. 이렇게 교영 시행 양상이 변화한 데에는 조선 정국의 사안이나 청나라 정보들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조선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으려면 청나라 측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기에 조선 측에서 청 조칙사에게 교영 면제를 요청할 때 조칙사로 누가 왔는지가 교영 면제 여부에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이처럼 17세기 조선의 대청 영접의례를 보면 조선이 표면적인 면에서 제후국으로서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사안에 따라 의례 기피를 시도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이행하기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 내에서 청나라에 대한 의식이나 사조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처럼, 청나라에 대한 표면적 의례 역시 일관적이지 않고 다양했던 것이다. 그만큼 조선의 표면적 대청 자세에 대해서도 재고의 여지가 충분하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