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永昇의 재미민족운동
- 주제(키워드) 강영승 ,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 대혁명당 , 흥사단 , 혁명운동건의서 ,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최기영
- 발행년도 2019
- 학위수여년월 2019.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64661
- UCI I804:11029-000000064661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본 논문의 목적은 일제강점기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강영승의 활동과 그 의의를 밝히는 데 있다. 강영승은 188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 1905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하와이 이민 이후 1909년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특히 법률지식을 통한 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으며, 재미한인들의 교육활동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강영승은 1913년경 시카고 해밀턴 법률대학(Hamilton College of Law in Chicago) 통신교수생으로 입학하면서 법학공부를 시작하였고, 1920년 한인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학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당시 재미한인들의 권익보호와 해방이후 조국에 보탬이 되고자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와 영어강습소, 유년국어강습소에서 한인들에게 영어와 한글을 가르치고, 대한인국민회의 교과서인 初等國民讀習을 편찬하는 등 한인들의 교육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을 바탕으로 강영승은 1922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총회장에 올라 재미한인들에게 교육을 강조하며 지식을 보급하고, 수재를 당한 동포들을 위해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강영승은 1929년 안창호의 대혁명당 조직 구상에 깊이 공감하여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그는 재미한인들이 공통성을 갖는 대혁명당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혁명당 조직을 통해 미주한인사회 통일을 추진한 것이었다. 흥사단에 입단한 강영승은 대혁명당 조직 실현과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 흥사단 경제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특히 1938년 대혁명당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방략인 「혁명운동건의서」를 국민회에 제출하였다. 강영승은 「혁명운동건의서」를 통해 전조선민족이 대혁명당으로 단결하고, 이를 중심으로 군사행동(무장투쟁)과 대외선전을 전개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안창호 사망 이후에도 대혁명당 조직을 지지하며 민족통일을 추구하고, 대혁명당 중심의 혁명방략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강영승의 「혁명운동건의서」는 국민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강영승은 안창호 사망 이후 흥사단 내에서 나타난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간에 갈등으로 인해 흥사단에서 출단 당하였다. 출단 이후 그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강영승은 미주독립운동 전반에 관여하며 폭넓은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교육활동에 주력하며 재미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법학지식을 통해 재미한인 권익보호에 힘쓰며 재미한인사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대혁명당 조직을 주장하여 조선민족의 통일을 추구하였고,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는 점을 볼 때, 미주독립운동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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