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의 초기 소설에 나타나는 주체의 분화 양상 연구 : 아브젝시옹 양상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Differentiation Patterns of the Subject in the Early Novels of Lee Je-Ha : Focused on the aspect of Abjection
초록/요약
본고는 이제하의 초기 중‧단편 소설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주체 분화 양상을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인 아브젝시옹abjection을 토대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이제하 소설이 지니는 경계성 불안과 문학적 의의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브젝시옹은 상징계적으로 안정된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기호계적 요소들을 자신으로부터 몰아내는 자아의 반응을 의미한다. 이때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것들’은 아브젝트abject로 의미화 될 수 있는데, 이제하의 작품 속에서 이 아브젝트들은 ‘모성적 육체’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재현되면서 인물들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제하의 작품 속에서 전경화 되는 아브젝트의 재현양상과 이에 따른 인물들의 아브젝시옹 양상을 고찰하고 이러한 과정이 인물들의 주체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상이한 아브젝트의 재현양상을 밝히고 이로 인한 인물들의 반응, 즉 아브젝시옹을 통해 어떤 주체로 분화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때 아브젝트는 ‘전도하는 어머니’, ‘억압하는 선행’, ‘타자와의 동일시’라는 형태로 재현된다. 먼저 「기적」과 「소경 눈뜨다」에서 아브젝트는 ‘전도하는 어머니’이다. 이 텍스트에서 ‘어머니’는 작품 속 ‘나’에게 종교의 폭력성을 새겨주고, ‘종교의 규율’을 제공한다. 동시에 ‘어머니’는 ‘나’와 여전히 미분화된 상태로, 끊임없이 ‘나’를 자신의 영역 속에 동화시키려 한다. 이처럼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어머니는 나에게 혐오와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다. 한편 아브젝트의 재현양상에 따라 ‘나’의 심리적 거리도 다를 수 있다. 여기서는 아브젝트의 근원인 어머니 자체가 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작품 속 ‘나’와 아브젝트의 거리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아브젝트를 맞이하는 인물들이 가장 원초적인 선택인 ‘도망’, ‘물리적 회피’등을 택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아브젝트가 인물들에게 혐오의 대상만은 아닌 까닭에, ‘어머니’라는 기호적 힘으로 인하여 ‘나’는 완벽한 분리는 결국 좌절된다. 이때의 인물들은 분리를 희망하지만, 결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동화되는 주체’로 분화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손」과 「비」에서는 모성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성질인 ‘양면성’이 아브젝트가 된다. 그리고 이 ‘양면성’은 ‘억압하는 선행’을 통해 극대화된다. 「손」에서 ‘나’는 ‘고통’을 매개로하는 ‘산모와 태아’의 관계에서 완벽한 피학자도 완벽한 가학자도 없음을 깨닫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이 ‘양면성’은 ‘나’가 ‘선행’을 맞이하게 될 때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을 제공한다. 여기서 단순한 악행 내지는 폭력성은 작품 속 ‘나’의 아브젝시옹을 유발하지 않으며, 어떤 공포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직 악행 같은 선행, 선행 같은 악행만이 ‘나’의 경계성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었으며,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기에 결국 ‘나’를 끌어당기는 기호적 인력이기도 하다. 결국 이 또한 인물들에게 양가적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아브젝트를 맞이하는 인물들은 ‘처벌자 되기’라는 뚜렷한 저항을 통해 양면성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시도한다. 완벽한 선행, 완벽한 악행은 없으므로, ‘나’는 타인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워 자신만이 완벽한 처벌자가 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더 큰 처벌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저지된다. 결과적으로 ‘처벌자 되기’의 행위는 끝내 성립되지 못하고, 이들은 더 큰 상징계의 법질서에 의하여 고립되는 주체가 되어버린다. 이는 기호적 인력에 대한 인물들의 적극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강력한 아브젝트의 권력을 반증한다. 마지막으로 「임금님의 귀」, 「자매일기」에서 인물들은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아브젝시옹을 경험한다. 이때의 타자는 모성적 육체의 자리를 대신하는 인물로서, 「임금님의 귀」에서는 ‘나’의 옛 연인, 「자매일기」에서는 ‘나’의 언니인 ‘명례’가 그러하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순히 혐오감만을 일으키는 대상들은 타자를 경유함으로써 아브젝트가 된다. 「자매일기」에서 ‘경례’는 극단적 폭력성을 과시하는 ‘서군’에게서 혐오감을 느끼지만, ‘명례’가 ‘서군’의 성적대상이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서군’을 찾아가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려 한다. 모성적 육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타자의 것이었기 때문에, 곧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타자를 통한 아브젝트 역시 쉽게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타자를 경유하였기 때문에 아브젝트와 자신의 거리는 가장 멀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의도적 굴복’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 된다. ‘의도적 굴복’은 자신의 경계를 위협하는 아브젝트의 강한 힘을 인식하고 자신 속에서 불가능을 발견하는 것이다. 불가능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아브젝트와 다름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아브젝트 자체에 굴복해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아는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데, 본고는 이를 ‘마조히즘 주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아브젝트의 근원인 모성적 권력에 기꺼이 굴복함으로써 안정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양상을 이제하의 초기 중‧단편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마조히즘은 처벌을 받기 이전에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면죄부를 획득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권력을 무화시킨다. 그러므로 작품 외적인 맥락에서 이러한 흐름은 곧 ‘아버지-모방’의 거부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이제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광기’가 규율이나 제도에 대한 반항으로부터 유발되었다는 기존의 평가를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브젝시옹의 일환으로 논의되었던 인물들의 광기는 아버지의 권력이 아닌 어머니의 권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제하는 도망에서 억압으로, 억압에서 굴복으로 이어지는 행동들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굴복만이 가장 나약하고도 저항적인 행위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흐름은 후기 소설에서 ‘침묵’의 형태로 발전된다. 더 이상 도망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이를 응시하는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견디고 스며들고 녹이는’ ‘정신의 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다소 단절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었던 이제하의 전반적인 작품 흐름은 이처럼 아브젝시옹 양상을 통해 광기에서 침묵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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