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德王의 對唐 외교와 政局 운영
- 주제(키워드) 聖德王 , 羅唐關係 , 唯識學 , 百官箴 , 國學 , 唐制化 , 王城國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曺凡煥
- 발행년도 2018
- 학위수여년월 2018. 2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63033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新羅의 聖德王(재위 702~737)은 재위 기간 동안 당에 일정한 빈도로, 빈번히 사절을 파견한 국왕으로, 이전까지 羅唐戰爭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교류가 냉각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양국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때문에 성덕왕은 신라 中代의 정치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다.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성덕왕의 외교가 신라 내적인 정국 운영과 어떻게 맞물려 움직였는가에 대하여 성덕왕 시기를 통시대적으로 살피면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첫째로, 성덕왕 시기의 불교는 성덕왕의 즉위 직후부터 양국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는 神文王·孝昭王 등 성덕왕 이전의 국왕이 주로 圓測계 唯識學(瑜伽宗)을 중심으로 하여 당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는 배경에 힘입은 것이었다. 원측계 유식학을 중심으로 불교 의례를 주관하면서, 성덕왕은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하였을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愷元‧文良 등의 관료 세력을 중심으로 한 불교 정책의 지지자들이 700년대 동안 성덕왕의 정국 운영의 주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700년대 후반부터 신라 내에서 기근‧재해 등이 빈번히 발생하고 당에서도 불교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퇴조하였으며, 그 대신 궁중 의례에서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華嚴宗 세력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河西州의 지방 통치 등에 역할이 한정되었으며, 원측계 유식학의 지위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였다. 이는 원측계 유식학과 달리 이들이 당과의 교류와 밀접한 관련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로, 성덕왕 시기 유교에 대한 시책은 711년 「百官箴」의 반포 이후로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백관잠」은 신료에 대한 계도의 의미 이외에 국왕 스스로의 반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관잠」 반포 이후 성덕왕 대 中侍로 임명되는 인물의 관등이 伊湌까지 상승하는 것으로 보아 百官들과 타협을 통해 정국의 안정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710년대 들어 성덕왕은 당 현종의 정치적 의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金守忠 등을 파견하여 당의 國學‧太子와 관련된 의례를 수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덕왕이 典祀署 등의 부서를 설치하여 국내의 제사를 정비하게 하고, 詳文師를 通文博士로 개편하면서 다수의 博士職을 설치하는 등 당과의 외교 및 학문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확대 개편한 것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715년 重慶이 太子로 임명된 것은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성덕왕은 중경의 어머니인 成貞王后의 出宮과 중경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 또한 유교적 정책에 입각한 시책을 통해 완화시켰다. 또한 이러한 唐制化의 진행 과정에서 당과의 교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金順元이 득세하여 外戚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셋째로, 성덕왕의 재위 기간 동안 渤海‧契丹‧奚 등이 정치체로서 발전하면서 성덕왕은 신라의 북방 정세에 대해서도 당과의 관계를 강화시켜 대비하고자 하였다. 특히 710년대 후반 이후, 신라의 사절은 당으로부터 武官職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신라의 북방 등에 대한 축성에 하나의 근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덕왕이 나아가 다수의 宿衛를 파견하여 당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이어나가고자 하였다는 것 또한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 과정에서 신라의 국내에서는 思恭‧允忠 등 친당적인 관료층이 정치 세력으로서 성장하여 성덕왕의 대당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720년대 후반, 당과 발해‧거란‧해 등이 충돌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신라는 당으로부터 친당 정책의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으며, 730년대 이후 양국의 밀접한 정치적 관계는 “仁義之鄕”‧“君子之國” 등의 용어로 문식되었다. 신라가 日本에 대해 사용한 “王城國” 등의 표현도, 국내의 “京城周作” 등 唐制의 도입과 적용과 밀접히 관련되어 국제 관계에서 신라가 당과 밀착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성덕왕 대의 정치는 활발하였던 대당 외교와 밀착해 있었다. 성덕왕 대의 다양한 사상과 방법론들은 결국 국가의 내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당시 성덕왕과 신라에서 추종하였던 여러 가지 정책의 외형은 “唐制”를 따랐으나, 실제로 그것은 신라의 국내적 질서와 국제적 지위를 성덕왕 스스로의 손으로 “마름질[制]”하려는 의도를 실현코자 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