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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Seol, Hwa

초록/요약

작년, (2016년) 한 상업영화에서 북한여자 역할로 오디션을 볼 기회가 있었다. 당연히 북한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몇 번 들어 본 게 전부였던 북한 사투리는 내게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북한 사투리를 배우기 위해 서강대 학생지원과에 수소문을 하여 새터민 친구들의 동아리 모임인 하나우리 소속의 한 학생을 소개 받았다. 그 친구에게 두 시간 가량 북한 사투리 교습을 받은 후, 마침 동아리 회식이 있던 날이라 그 모임에 초대 되었다. 십 여 명의 탈북자 출신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나 혼자만 유일하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말씨를 쓰는 사람이었다. 평소 단체로 만나 먹고 노는 자리를 즐겨하지 않는 나에게는, 더군다나 그 날 처음 만난 북한에서 온 친구들과의 회식자리에 참석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나는 참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우리와 많이 다르면서도 같았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어려운 북한사람들의 생활이나 배경도 그들 모습 중 하나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쪽배로 국경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탈북 해 정착한 친구도 있었다. 남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아픈 배경을 가지고도 우리와 똑같이 꿈을 꾸고, 시답지 않은 농담도 하며, 아이폰과 성적과 이성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많은, 그냥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탈북자 3만 명 시대, 북한에서 한국으로 탈출해 온 그들의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고 보았었다. 그러나 실제로 단 한 번도 북한출신의 사람을 본 적도, 말 한마디 건네 본 적도 없던 내게는 신선한, 편견이 깨지는 경험이었다. 그들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그 만남이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 날의 경험이 탈북자를 소재로 시나리오를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야기의 소재와 리얼리티를 위해 5명의 탈북자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들의 한국정착 기간은 길게는 5년, 짧게는 3년 정도의 시간으로 탈북 이전의 삶과 여러 에피소드 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인터뷰이들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야깃거리를 찾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탈북경로에서 국경을 넘기까지 며칠 동안 총 27명의 브로커를 거쳐 제 3국에 도착한 일, 태국 감옥에서의 수감생활, 한국으로 오기 위해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에서 본 밤하늘, 죽음도 각오하고 꿈꾸던 남한에 왔지만, 갖가지 다른 문화적 충격부터 지하철은 어떻게 타고, 마트에서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차 몰라 겪었던 좌절감, 상실감 등, 탈북과정, 정착 초기의 경험담만으로도 내 머릿속에 많은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폐쇄되고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자유의 땅 남한으로의 이주가 마냥 행복하고 기쁠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착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방인 같은 삶을 사는 이들, 또 어떻게든 극복하고 살아보려고 애쓰며 분투하는 이들, 잘 적응하여 새로운 터전에서 새 삶을 사는 이들, 그들의 다양한 모습과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이 후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첫 초고가 나왔을 때 시나리오의 분량만 가늠해 봐도 어림잡아 40분 이상의 장편이었다. 소재가 소재이니 만큼 20분 내외의 단편으로 탈북자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많이 자르고 쳐내고 함축적으로 인물을 보여주고 극을 구성해야 했다. 그 때 탈북자라는 어려운 소재를 골랐던 나를 탓하기도 했다. 또 단편이지만 극 중 꼭 필요한 여러 로케이션과 소품 등이 적은 제작비 안에서 잘 진행될지 걱정이 됐다. 거기다가 북한말로 연기해야 하는 부담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쉬운 소재로 다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무렵, 탈북자를 소재로 한 박정범 감독의 영화 ‘무산일기’를 봤다. 충격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제작여건으로 그리 세련되지 않은 화면과, 비전문 배우인 박정범 감독의 연기는 관객인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강렬한 메시지와 주인공 ‘승철’에 대한 애잔함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지속되었다. 그 이후로 어떻게 하면 영화의 메시지와 주인공 ‘설화’의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면 탈북자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담감에 대한 나의 초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땅에서의 탈북자들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 같은 모습에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이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 다른 문화차이로, 또 한 민족에게서 받는 차별과 편견으로 인한 그들의 고충은 일반 외국인들이 겪는 고충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한다. 심지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탈북민들이 있을 정도다. 탈북자 신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설화’가 ‘두식’을 만남으로써 점점 희망을 갖게 된다. 두식은 유력한 사람이 아니다. 설화와 같이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두식의 작은 관심이 설화에게는 새로운 삶을 소망할 수 있는 빛이 되었다. 스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악플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한다.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악성댓글이라도 달리는 것이, 그렇게라도 자신을 기억하고 주목해 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탈북민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진심으로 배려하는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작은 배려와 관심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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