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金亨俊(金午星)의 천도교청년운동과 문예활동
- 주제(키워드) 김형준 , 김오성 , 천도교 , 용천 , 농촌운동 , 천도교청년당 , 당성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최기영
- 발행년도 2017
- 학위수여년월 2017.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62239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김형준은 본명보다 김오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기존 연구에서 그는 해방 공간의 좌익 계열 정치인 혹은 기회주의자로 평가받았으며, 해방 이후의 활동에 주목한 연구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강점기 천도교인이자 대중운동가인 동시에 문학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한편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활동하였다. 본 연구는 김형준의 일제강점기 행적에 주목한다. 해방 직후 대중 정치인으로 인지도를 얻은 인물이라면 해방 이전에도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활동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행적과 의의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이 부분이 해결된다면 해방 이후 김형준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기존의 단편적으로 이루어졌던 평가를 넘어서 그를 새롭게 바라봄과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 참여했던 그의 활동 변화 궤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형준은 190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천도교 집안 출신으로 집이 가난하여 정규 학교를 다니는 대신 천도교회의 모임과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의 활동은 1920년대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농촌 운동과 천도교 활동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김형준은 그 중에서도 지역 농촌단체 조직과 농민 계몽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 당직을 맡아 포덕과 교육에 집중하였다. 그는 종교와 사회 활동을 병행하였지만 농민과 같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선불이농장 사건에 관련되면서 수사를 받았고,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형준은 日本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정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동경 천도교 종리원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며 학업과 천도교 활동을 병행하였다. 1930년대 초에 귀국한 김형준의 활동은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천도교 활동과 사회 운동을 병행하며 천도교의 이론가이자 청년운동가로 활동하였다. 한편 농민·노동자 운동에 참여하여 『농민』에 니체 철학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하는 글을 다수 작성하였다. 그러나 김형준의 천도교 참여는 193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중단되었는데, 이는 사회 참여대신 종교에 집중하는 천도교청년당 활동 노선 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이던 철학 분야로 활동 공간을 이동하였고, 비평 문학계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활동 공간을 옮겼음에도 김형준은 대중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청년과 농민, 노동자를 꾸준히 주목하였다. 그는 '신세대론'의 주요 논객이었으며, 다각도로 청년 문제를 다루었다. 이와 같이 김형준은 과거 용천 농민운동과 천도교청년당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중과 사회에 집중하여 이론의 현실화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해방 직전 여운형 측에 가담하여 사회 변화를 직접적으로 논할 수 있는 정치 참여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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