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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약진 운동의 사상적 기원에 관한 고찰 : 스탈린 모델의 모택동식 수용

초록/요약

본 논문은 1958년 대약진 운동을 있게 한 모택동의 사상적 여정을 정리했으며, 시기적으로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부터 1957년 중반까지의 시기를 다루었다. 흔히 대약진 운동을 이해하는 방식은 소련의 ‘스탈린 모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택동이 특유의 주의주의적 신념 아래 농민 대중을 동원해 전국적인 농촌 공업화 드라이브를 걸었으며, ‘비합리적’ 정책의 결과 대기근 등 ‘재앙’을 낳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약진 운동의 사상적 기원을 회고하는 본 논문은 이 가운데 동기의 측면에 우선 주목했다. 모택동은 ‘스탈린 모델’을 벗어나려 했는가? ‘스탈린 모델’은 농민을 희생시키는 중공업 위주 발전 전략으로, 중국의 경우 소련을 본떠 도입한 제1차 5개년계획이 대표적이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흐루쇼프는 농업 부문을 중심으로 물질적 유인의 증대, 발전주의, 전문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경제개혁이 수행되었다. 이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모델을 후퇴시킨 것으로, 기원을 따지면 ‘전시공산주의’적 상황을 극복하려 한 레닌의 (자본주의적) 신경제정책(NEP)과 성격 상 친화적이다. 그런데 ‘스탈린 모델’은 애초에 NEP를 극복하려 한 것이라는 점에서 레닌-스탈린-흐루쇼프의 농업 전략, 나아가 발전 전략에는 일종의 대립 구도를 그릴 수 있으며, 레닌 스스로가 NEP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취했고, 흐루쇼프가 NEP를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전 전략의 대립 구도는 긴장 구도로 다시 해석된다. 그렇다면 긴장을 분석하기 위한 핵심 과제는, 레닌과 흐루쇼프의 사이에 있는 ‘스탈린 모델’ 및 스탈린이 가진 모순들을 살펴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모순들은 향후 중국에서 모택동 앞에 유사한 형태로 재현된다. ‘스탈린 모델’과 스탈린이 당대 직면한 모순을 유추하기 위해 본 논문은 스탈린이 저술을 주도했거나 직접 저술한 두 권의 책에 주목했다.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당사 요약 교본』(『당사 교본』)은 NEP의 종결과 ‘스탈린 모델’ 개시의 정당화를 목적으로 한 책이다. 스탈린은 이 책에서 ① NEP를 통해 사회주의적 발전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필수 조건이 갖추어졌으며, ② 적대적인 국제 환경에서 자본주의 진영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업 발전이 필수적이지만, ③ 공업화를 뒷받침할 자원이 국내에서 충당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는 농민을 집단화해 그 잉여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는 국제적 ‘고립’을 근거로 하는 상황 논리였다. 한편,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경제 문제』)는 ‘스탈린 모델’이 적용된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한 말년 스탈린의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저작이다. 스탈린은 이 책에서 소련 사회주의가 직면한 모순은 ① 경제 법칙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당 간부의 문제에서 기원한다면서, ‘유능한’ 간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사회적 과제로서 ② 도시(공업)-향촌(농업) 및 육체노동-정신노동 간의 ‘차이’를 소멸시켜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경제 문제』를 통해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을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경전화한 ‘스탈린 모델’이 낳은 모순 자체는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전모를 드러내지는 않은 채로 남겨진 스탈린의 문제는 흐루쇼프에게는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1953년 이래로 소련과 거리를 두며 ‘소련의 오늘’(흐루쇼프)을 따르는 대신 1953년 이래로 발전 전략에서 중국 ‘자신의 길’을 모색하면서 오히려 ‘소련의 어제’(스탈린)와 유사한 방식을 택했다. 모택동은 NEP 친화적인 ‘신민주주의적 질서’ 및 온건한 발전 전략을 견지하려 한 당 간부들을 우회해 농민 대중과 직접 소통함으로써 1955년을 전후해 신속한 농업 집단화에 성공했다. 이러한 경험은 모택동에게 ‘대중노선’으로 정리되었고, 모택동은 성급한 하향식 집단화, 즉 ‘소련(스탈린)의 오류’를 극복한, 대중(농민)의 적극성과 당의 지도를 기초로 하는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56년 상반기까지 모택동의 자신감이 되었으며, 모택동은 중국이 사회주의 단계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한편 1956년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을 통해 스탈린을 정치적으로 비판했다. 모택동은 이를 통해 더욱 적극적인 ‘사상해방’의 조건을 얻었고, 4월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하여」와 「열 가지 관계를 논함」에서 소련 사회주의의 경험과 중국 사회주의의 모순에 관한 확장된 사고를 보여주었다. 이들 글에서 모택동은 우선 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모순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대중노선으로 극복해야 하며, ② ‘스탈린 모델’(소련)의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각 공산주의 운동은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③ 공산당 일당체제가 아닌 연합집정의 가능성마저 (모순적이지만) 타진되었다. 그러나 1956년 하반기, 「비밀 연설」에서 시작된 국제 공산주의 운동 진영에 대한 대내외적 공세와 중국 사회 내부의 경제적·사회적 문제 표출은, 1956년 상반기에 나타난 모택동의 ‘사상해방’적 개방성을 수축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 재론」이라는 국제적 문건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 모택동은 ① 소련, 나아가 국제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을 제국주의적 공세로 규정하고, ② 스탈린을 강하게 긍정함으로써 적·아 구분의 경계를 확실히 했으며, 국제 공산주의 진영 내 ‘수정주의’ 비판을 통해 이를 국내적 경계로 확대했고, ③ (흐루쇼프가 하지 못한) 단호하고 적극적인 대응으로써 국제 공산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시도는 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한 직시라기보다는, 막 터져 나오는 모순들을 임시로 봉합하는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57년 전반기로 넘어가면서 중국 국내의 모순 표출은 더 이상 임시적 대응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모택동이 내놓은 사상적 실천 성과물 가운데 가장 모순적인 것으로, 모택동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이 글에서 ① 사회주의 사회 안에는 적대적 모순뿐만 아니라 ‘인민 내부의 모순’, 즉 대중 내부 및 당과 대중 사이의 모순도 존재함을 인정했다. 이는 스탈린이 암시만 했을 뿐 직시하지 않은 모순을 모택동이 주체적 방식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② ‘인민 내부의 모순’이 발생하는 원인은 사회주의 제도가 완비되지 않은 데 있으며, 그것은 모택동에 의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는 생산력의 낙후라는 근본적인 모순 대신,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에서는 근본 모순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만을 논했다. 이 글이 보여주는 ‘딜레마’는 대체로 여기에서 출발하는데, 근본적인 모순의 해결(생산력 발전) 없이 변증법적으로 현상적인 모순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완전히 해결, 즉 사회주의 제도의 완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관리할 당과 자신만이 긍정될 뿐이며, 근본적인 모순을 남긴 채로 ‘모순적으로’ 종결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당시 모택동이 당내에서 신속한 생산력 발전을 신경질적으로 주장하며 당 간부들과 마찰을 일으킨 데서 ‘딜레마’로서의 스스로를 증명한다. 모택동은 결국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대중의 정치적 의식의 획기적 전환과 생산관계의 변혁을 통한 신속한 생산력 발전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대약진’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본 논문은 스탈린과 모택동이라는, 일견 단순한 독재자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실천 중에 겪었을 곤혹과 딜레마를 조명하려는 시도였다. 당연하지만 이 시도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자거나 폭압적인 통치 전반을 퇴색시키려는 목적을 띠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면서도 그들의 딜레마를 곱씹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실패한 역사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얼마든지 유용한 사상적 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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