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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와 모성신화의 정치 : 태국-유니세프 모유수유 캠페인(1977-1995) 사례를 중심으로

UNICEF and Politics of Maternal Myths: a case study of UNICEF's breastfeeding campaign in Thailand (1977-1995)

초록/요약

본 논문은 유니세프와 태국 정부가 시행한 모유수유 캠페인의 1977년부터 1995년 사이의 경험을 살펴봄으로써, 해당 캠페인에 나타난 각 시대별 모성신화와 그 담론적 기능을 분석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1970년대 ‘국제적’ 보건의제로 등장한 모유수유가 당대 개발도상국이었던 태국의 ‘국가적’ 보건정책으로 실행된 과정을 통해 모유수유가 태국 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개념화되었으며, 이렇게 재개념화된 모유수유를 둘러싼 모성신화가 당대 태국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추적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서구 중심의 국제개발기구가 개발도상국 여성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보건·젠더 개발 정책 및 그 담론적 정당성은 그것이 실천되는 해당 지역의 특수한 역사 및 정치경제학적 맥락과 조응하여, 개발도상국 내 지배적 젠더 규범과 이데올로기를 공고히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활용됨을 밝히고자 한다. 국제적 층위에서 모유수유가 본격적인 보건의제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서구 시민사회가 주도한 네슬레(Nestlé) 불매운동이 촉발되면서이다. 이들 서구의 시민운동가들은 네슬레로 대표되는 다국적 분유회사의 마케팅 전략이 개발도상국의 높은 영유아 사망률의 원인이라며, 글로벌 자본주의의 착취로부터 이들 가난한 국가의 여성과 아이를 보호할 것을 촉구했다. 이 같은 서구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거세지자 1970년대 말부터 유니세프와 WHO는 모유수유를 국제적인 보건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니세프와 WHO가 모유수유를 국제적 보건의제로 주목한 것은 단순히 서구 시민운동의 슬로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들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구조조정을 감행했고, 그 결과 교육, 의료, 사회복지 부문과 같이 기초 복지 분야에 대한 예산이 대거 삭감된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유니세프와 WHO는 개발도상국의 구조적 빈곤에 의해 발생되는 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으로 저렴하면서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예방적 차원의 의학적 개입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모유수유는 별도의 비용과 기술 없이도 개도국 영유아의 영양결핍을 예방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해법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유니세프와 WHO에 의해 의학적, 기술적 해결책으로 주목받은 모유수유는 태국의 제4차 경제사회개발계획(1977-1981)을 통해 처음 태국의 국가적 보건의제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국제적’ 층위에서 형성된 예방적, 기술적 처방으로서의 모유수유가 태국의 ‘국가적’ 보건의제로 실행되는 과정에는 당대 태국 사회의 모성신화라는 젠더 규범이 강력한 정책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본 논문은 태국 내 모유수유 캠페인을 크게 1980년대와 1990년대로 나누어 각 시대별 캠페인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성신화와 이것이 당대 태국 사회의 정치경제학적 맥락과 맺는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시행된 태국의 1980년대의 모유수유 캠페인의 경우, 모유수유를 둘러싼 농촌여성들의 전근대적 미신과 관습을 문제화하고, 이들을 근대적 보건 지식과 실천의 영역으로 흡수시키기 위한 담론적 실천들이 강조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모유수유는 가난한 농촌여성이 할 수 있는 저렴하고, 기술이 필요 없는 ‘의학적이고 근대적 양육기술’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당대의 바람직한 엄마란 모유수유와 같이 근대적 보건지식과 실천을 수행하는 근대적 모성을 뜻했으며, 이는 곧 ‘올바른 국민’으로서의 엄마의 역할을 뜻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성신화는 1980년대 쁘렘 군사정권 하에서 농촌여성을 중심으로 내세운 민족정체성의 구현이라는 국가적 기획과 1980년대부터 점차 확산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합쳐진 당대 태국의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모유수유 캠페인은 농촌지역 빈곤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영유아 영양결핍을 농촌엄마들의 무지한 행위로 문제화함으로써, 빈곤과 보건문제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개인에 이양하는 담론적 장치이자, 이를 위해 모범적 국민으로서 모성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모성신화가 강력한 정책적 수사학으로 동원된 것이다. 또한, 1990년대의 태국 모유수유 캠페인은 주로 도심지역의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중산층 및 고학력의 일하는 엄마들’을 이상적 모성으로 재현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모유수유를 위한 여성의 역량강화’라는 슬로건은 임금노동과 양육노동 모두를 ‘스스로’ 수행하는 여성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적 수사학으로 기능했다. 이는 태국 내 글로벌 자본시장의 확대로 인해 신흥 비즈니스 계층 및 중산층이 급증하는 한편,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1990년대 여성의 이주와 노동시장 참여가 증가하면서 나타난 젠더 담론의 변화와 시대적 배경에 근거한다. 따라서 1990년대 모유수유 캠페인은 이른바 ‘슈퍼맘’ 모성신화를 동력으로 임금노동과 양육노동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는 담론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개발도상국의 구조적 빈곤문제에 대한 의학적, 기술적 개입으로 수단화된 모유수유 개념이 태국의 국가적 보건의제로 수행되는 과정에는 각 시대별 특징적인 모성신화가 강력한 정책적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통적으로 이 같은 모성신화는 당시 태국사회에서 농촌여성 및 도시 하층계급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위치해 있었던 계급적 현실을 각각 ‘모범적인 국민으로서의 모성’과 ‘슈퍼맘’이라는 모성신화로 은폐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빈곤의 구조적 요인을 비가시화시키고, 비정치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본 논문은 국제적 층위에서 형성된 국제개발의 젠더 및 보건 정책이 해석되고 실천되는 지역적 맥락은 다르며, 이러한 정책이 소비되는 방식은 오히려 기존의 개발도상국 내의 젠더 규범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정당성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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