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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말 갈항사와 진골 귀족

Gal-hang-sa and Jingol Nobles in mid-late Silla Dynasty

초록/요약

본고는 신라 중대 말 화엄종의 승려 승전이 김천시에 창건한 갈항사가 약 50년 뒤 원성왕 외가에 의해 두 탑이 세워지며 중창되고, 다시 30년 뒤 원성왕대에 탑에 명문이 새겨지며 새롭게 중창되는 배경을 유기적으로 밝혀내고자 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사료를 분석·해석하고 기존 연구를 검토한 결과, 중창 배경을 세 단계의 논지에 따라 새롭게 제안해 볼 수 있었다. 첫째, 승전은 690년대 말~700년대 초 법장의 통합불교로서의 화엄종을 처음으로 신라에 들여온 승려였다.『삼국유사』의「승전촉루조」에 ‘원융한 가르침이 청구에 두루 퍼진 것은 승전의 공‘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맥락상 그 가르침은 법장의 화엄종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법장에게 부탁받은 대로 의상에게 법장의 저술과 서신을 전해준 뒤, 법장의 화엄종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불교 및 화엄과 관련 깊은 사찰들이 있는 김천시에 갈항사를 창건한 것이다. 독특한 강론방식인 ‘석촉루와의 대화’는 화엄의 대중화를 위한 그 의 노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생각된다. 둘째, 758년 이 사찰에 동‧서 삼층석탑을 세운 원성왕 외가의 세 오누이인 조문황태후, 영묘사의 언적법사, 그리고 경신태왕의 유모는 당시 유력한 진골귀족이었던 모량부 박씨 세력으로 보인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였는데, 품계 높은 진골귀족 집안이었던 원성왕家와 통혼할 만한 박씨로 모량부 박씨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또한 언적법사는 모량부 박씨 세력의 거점에 위치하고 왕실과 관계된 기능을 하던 유력사찰인 영묘사의 주지로 있었다. 이와 같은 논지는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실에 많은 박씨왕비 및 박씨왕모가 등장한다는 사실에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한편 모량부 박씨 세력은 법상종과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신라법상종의 이론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원측이 모량부 박씨 출신의 인물이었고, 모량부 박씨 세력이 원측의 제자 도증의 신라법상종 발전에 적극적 후원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셋째, 경덕왕 시기 갈항사가 중창된 배경은 경덕왕과 모량부 박씨 세력의 전략적인 연합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경덕왕의 외척세력이자 강력한 진골귀족인 김순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세력동맹이 필요했던 것이다. 경덕왕은 김순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 강화를 추구하고 싶었고, 원성왕 외가는 효성왕대 박씨왕비의 출궁으로 큰 정치적 타격을 준 김순원의 축출을 통해 실권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합의 증표로 불사활동을 택한 이유는, 경덕왕이 왕권강화책으로 활발한 불사활동을 펼쳤고, 김순원 세력의 기반이 사찰과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많은 사찰들 중 특별히 갈항사를 중창했던 이유는 두 세력의 종교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사찰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후 경덕왕은 영묘사에 큰 후원을 하고,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법상종의 승려인 대현을 부르는 등 원성왕 외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27년 뒤 원성왕대에 갈항사의 동탑에 명문이 새겨지는데, 이는 치열한 대립관계 속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이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었던 경덕왕대의 안정적인 정국을 재현하고자 하는 바람의 일환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듯 승전과 갈항사는 신라 중대 말, 신라의 불교사상과 당대 진골귀족 및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 주목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사적 가치를 토대로, 두 주제가 학계에서 재조명되고 이와 관련한 새로운 후속연구가 발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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