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成龍의『懲毖錄』硏究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계승범
- 발행년도 2017
- 학위수여년월 2017. 2
- 학위명 박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61591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후 최대의 위기였다. 전란 기간 동안 유성룡은 영의정 · 도체찰사 · 훈련도감 도제조 등을 역임하면서 국정과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전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란을 막지 못했다는 전란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계에서는 임진왜란기간 동안 그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반면 그가 저술한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유성룡의 찬술한 『징비록』을 당시의 컨텍스트 속에서 파악하였다. 즉 징비록을 그의 정치적 · 사회적 환경과 정치적 위기 의식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自序에 나타난 『징비록』의 저술 목적과 그 체재와 내용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그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본 연구에서는 유성룡이 낙향 후 가장 먼저 저술한 임진왜란 기록인 『난후잡록』을 발굴하여, 『징비록』의 성립 과정을 구명하였다. 『난후잡록』은 유성룡의 친필 초록으로 『징비록』의 서명이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징비록』을 구성하는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유성룡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는 『난후잡록』을 서술하고 체재를 바꾸어 또 다른 친필 초록인 『초본징비록』을 저술하였다. 필자는 유성룡의 두 친필 초록 본의 자서와 내용을 비교 ·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징비록』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성립되고 간행되었는가를 구명하였다. 유성룡은 자신에게 제기된 전란책임론을 변핵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쓴 글을 저술로 처음 완성한 것이 『난후잡록』이었다. 이후 그는 사체를 편년체로 바꾸어 『초본징비록』을 따로 저술하였다. 그의 의도는 『초본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을 전개 과정에 따라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자신의 전란 동안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초본징비록』은 자신이 전란 기간 동안 작성한 공문서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징비록』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고 후손들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징비록』은 간행 직후부터 조야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무엇보다 『선조실록』을 수정하는 중요한 강령으로 취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징비록』은 조선 후기의 역사서인 『연려실기술』과 『해동역사』에 영향을 주었고, 사행록과 교린지에도 인용되어 통신사 파견의 규범서로 인식되었다. 한편 일본에도 유출되어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고, 상업적으로 출판되어 일반 대중에게도 보급되었다. 유성룡이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당파에 따라 『징비록』도 다르게 평가하였다. 그 가운데 서인인 안방준은 『은봉전서』를 통해 유성룡을 비판하였다. 그는 유성룡이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저지하여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고, 『징비록』에 기술된 통신사 파견과 명의 주문사 파견 내용도 사실과 다름을 지적하였다. 안방준의 유성룡과 『징비록』 비판이 모두 타당할 수는 없지만, 『징비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북인들에게는 주화오국의 간인으로 지목된 유성룡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관제야당으로 남인이 참여하는 정치 구도가 전개된 것이 유성룡에 대한 인식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和議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그에 대한 평가에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징비록』은 대체로 남인들에게는 필독서로 서인에게는 자신의 공만을 강조한 책이라는 서로 다른 평가를 받았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의 대일관계 기사와 몽진 기사는 『선조실록』의 미비점을 보완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반면 『징비록』에 기술된 전투 기사는 상급 지휘관의 전공 보고에 의존하여 사실 관계의 오류도 산견된다. 따라서 『징비록』에 대한 연구는 사료적 가치와 한계를 아울러 파악함으로써 다양한 측면에서 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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