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宵海 張建相의 국가건설운동과 혁신계 통합운동
- 주제(키워드) 국가건설운동 , 혁신계 , 통일운동 , 장건상 , 좌우합작 , 중간파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 지도교수 최기영
- 발행년도 2017
- 학위수여년월 2017. 2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61419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이 연구는 장건상의 해방 후 혁신계 정치활동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건상은 일제강점기에 임시정부 출신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했던 인물이며 1920년대 이후에는 좌우연합전선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좌우가 연합해서 통일운동을 하는 것이 독립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해방 후에도 유지되었고, 이에 따라 남북이 미소양국에 의해 분단 점령되었을 때에도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데에 모든 역량이 집중되었다. 장건상은 여운형 노선에 동의하고 함께 활동을 했으며 민족주의민족전선,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 등에 참여했다. 특히 근민당은 창당 직후 여운형이 사망하면서 장건상이 근민당의 우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서 남은 이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며 끝까지 단정 수립에 반대했으나, 끝내 남한에는 이승만을 필두로 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말았다.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 그는 제2대 총선에 참여해서 통일 문제의 해결을 꾀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근민당 활동과 남북협상 참여 경력 등이 문제가 되어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50년대 중반 이승만의 독재에 대항하여 혁신계가 처음 형성되었을 때 장건상은 조봉암의 진보당 결성에 반대했다. 이는 그가 혁신계 전체가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당을 창당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당사건으로 혁신계 활동은 한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다시 정치계에 나서게 된 장건상은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혁신계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건상이 지속적으로 혁신계 통합을 강조했던 것은 그의 궁극적 목표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우선 혁신계가 통합되어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신계는 다양한 배경과 이념을 가진 이들의 집단이었던 만큼 쉽게 통합되지 못했다. 장건상은 혁신계 통합과 통일운동을 목적으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이 민자통에서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었던 혁신계 정당 중 일부의 통합이 시도되기도 했다. 장건상의 혁신계 통합을 위한 활동과 통일운동은 어디까지나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실현 방안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북한 정부를 인정하고 남북협상을 강조하는 등, 대중의 정서와 유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은 당시 혁신계 정치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계이며, 이에 따라 남한 단정 수립 이후의 혁신계 정치 활동은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5.16 쿠데타를 맞아 해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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