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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犯越사건을 통해 본 朝鮮의 對淸 태도

초록/요약

犯越이라는 단어는 국외로 越境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음을 의미하며, 조선과 청 모두 이 문제에 민감하였다. 그런데 대체로 18세기를 바라볼 때는 범월 문제를 양국이 안정적으로 처리하였거나, 더 나아가서 동등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고 보는 주장이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점은 백두산정계비에 근대적인 의미의 국경선 성립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범월문제를 대등한 국가 간에 벌어진 강역 확보 사안으로 보려고 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범월사건은 대부분 국경과 영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미 종료된 후에 발생한 외교 사안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8세기에 일어난 범월사건, 특히 죄인들에 대한 형량 책정을 중심으로 조선이 청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살펴보았다. 康熙帝는 집권 전반부(~1703)까지 범월사건이 발생하면 조선에 査問使를 파견하였고, 조선국왕과 淸使가 공동으로 심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판결 내용은 일관성이 없어서, 조선이 청의 판단기준과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은 청에서 이미 알고 있기에 자문을 보내 보고할 수밖에 없는 사안을 제외하면, 범월사건을 되도록 청에 알리지 않고 처결하였다. 그런데 1704년(숙종 30) 강희제가 사문사 파견을 중지하고, 조선의 관원과 함께 鳳凰城에서 회동하여 사건을 조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한편 강희제는 청인의 범월에 대한 조선의 금령 요청에 대해 1712년(숙종 38)부터 조선의 적극적인 처벌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은 청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인 범월자는 규정 이상으로 엄히 처벌하는 한편 청인 범월자에 대해서는 금령 요청만을 반복하였다. 강희제의 뒤를 이은 雍正帝는 조선에 대해 강희제보다 강경한 범월정책을 펼쳤다. 옹정제는 범월사건에 대해서는 조선에 재량권을 주지 않고 例대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英祖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옹정제는 강희제보다 조선의 판결에 대해 깊이 관여하였고, 영조는 이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영조는 숙종 대와 마찬가지로 채삼·망명·벌목·단순월경죄인들을 청에 보고하지 않았지만, 이들조차 사형으로 일관하여 처리하고자 했다. 영조의 본의는 죄인들에게 엄형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황제의 적극적인 개입 앞에 영조의 선택권은 넓지 않았다. 청에서 1735년 乾隆帝가 즉위하고 그가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영조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범월사건 처리 방침을 추진하였다. 건륭제는 범월자들에 대한 형량을 낮추었고, 이는 영조와 정책 방향성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영조도 조선인 어채를 梟示에서 제외하거나, 청에 금령을 재요청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조선의 입지를 구축하였다. 더 나아가 영조는 범월사건을 청에 보고하지 않는 경우에는 首犯만을 사형시키거나 전원 풀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황제의 개입이 위협적으로 다가올 때는 죄인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나마도 1764년(영조 40) 황제가 형률을 다시 엄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자마자, 조선은 30년 정도 지속해왔던 완화책을 곧바로 철회하였다. 비록 건륭제 재위기 동안에 황제의 정책이 일전과는 달리 온건한 양상을 지녔지만, 그럼에도 조선은 청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눈치를 보았던 것이다. 비록 본고는 범월사건에 한정지어 이 문제를 살펴본 것이지만, 100년 이상 지속된 18세기 양국의 범월사건 처리 방침을 살펴보면 처결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조선이 청을 바라보는 시각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조선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의 의향을 살펴야 하는 국가였다. 특히 범월과 같이 조선과 청이 모두 얽힌 사안은, 결코 조선이 주도권을 쥘 수가 없었다. 오히려 조선은 18세기까지도 황제에 의해 ‘주어진 자율성’에 얽매여 청의 눈치를 끊임없이 보았고, 결국에는 청의 의도를 잘 읽고 그에 따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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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요약

The word beomwol indicates that trespassing borders was considered a crime, and that Chosŏn and Qing both took it as a sensitive matter. Many argue that in the eighteenth century, border-trespassing issues were resolved smoothly between Chosŏn and Qing, and that the two states were in an equal position. This argument is based on considering that Baekdusan Junggyebi(Baekdusan National Boundary Monument) indicates a modern concept of national boundary line, and that border-trespassing was a territory dispute between modern states of equal level. However, a border-trespass is a diplomatic issue which occurs after territories and borders are all discussed and set. This paper aims to focus on Chosŏn’s diplomatic attitude towards Qing in the eighteenth century, through discussing sentences for the border-trespassers. During the early rules of Emperor Kang-Xi(∼1703), cháwènshǐ(fact-finding envoys) was sent to Chosŏn when a border-trespassing case happened. Judgements were made after the suspect was questioned by both the King of Chosŏn and cháwènshǐ, but since the ruling was not consistent, it was difficult for Chosŏn to see through Qing’s opinion, nor their standard of judgement. This made Chosŏn to settle border-trespassing cases without notifying Qing unless they already know about them. However, on 1704, Emperor Kang-Xi stopped sending cháwènshǐ; rather, he chose to meet Chosŏn’s officials in Fenghuangcheng to question suspects. He also insisted on 1712 that Chosŏn should punish Qing’s border-trespassers more actively. However, fearing the Emperor’s reprimand, Chosŏn heavily punished its own people’s border-trespassing cases, but only repeated to ask for prohibition orders when Qing’s people committed the same crime. Emperor Yong-Zheng, who succeeded Emperor Kang-Xi, enforced stricter rules for Chosŏn’s border trespassing cases. He did not give Chosŏn any option to determine. King Yongjo had no choice but to follow this rule: Emperor Yong-Zheng deeply intervened with Chosŏn’s judgments, and King Yongjo could not find any way to become free from his authority. King Yongjo, like King Sukjong, did not notify Qing when the causes of border-trespassing cases were not so significant, such as gathering ginseng, exile, logging, or other simple reasons. But unlike King Sukjong, he insisted on sentencing all of them with death. Even though King Yongjo did not want to sentence such harsh punishments, he did not have much choice under Emperor Yong-Zheng’s heavy influence. On 1735, with the newly throned Emperor Qian-Long declaring amnesty in a large scale, King Yongjo began to push his position forward on treating border-trespassing cases. Emperor Qian-Long lowered punishments toward border-trespassers, and it was in accordance with King Yongjo’s intention. King Yongjo started to establish a solid foothold for Chosŏn by lowering penalties for Chosŏn’s border-trespassers and re-demanding Qing with a prohibition order. Furthermore, he only executed the leader of the crime or even pardoned all of them when the case was not notified to Qing. However, Chosŏn kept enforcing overly harsh punishments every time when the Emperor’s intervention deepened threateningly. On 1764, when the Emperor declared strict penal code for border-trespassing cases, Chosŏn immediately withdrew its merciful attitude which has been continued for thirty years. Even in times when Qing held a moderate stance, Chosŏn was always anxious about Qing. This paper focuses mainly on border-trespassing cases and how Chosŏn and Qing’s position in punishing the issue kept changing for a century. The sentences for punishment changed over time, but the essence of how Chosŏn perceived Qing did not; Chosŏn had to be aware of Qing’s intentions, whether they wanted to or not. Chosŏn could not implement its own decisions even when Qing was not involved. In cases which both states were involved, such as border-trespassing, Chosŏn could not take the leadership in settling the case. Rather, Chosŏn was always anxious about Qing’s perspective, and had no choice but to read Qing’s intentions well and comply with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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