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王京과 「迎日冷水里新羅碑」 : 5~6세기 신라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 주제(키워드) 도움말 영일냉수리신라비 , 신라 왕경 , 富民 , 냉수리 고분 , Yeongil Naengsuri Silla monument , Silla royal capital , rich people , Naengsuri tomb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조범환
- 발행년도 2016
- 학위수여년월 2016. 2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59059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냉수리비」는 명문의 대부분이 판독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많은 논쟁이 제기되고 있는 비다. 특히 「냉수리비」에 나오는 재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를 명확하게 밝혀 줄 만한 내용이 비문에 나타나지 않고, 사료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여러 문제들이 지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문 이해의 핵심 내용인 분쟁에 초점을 맞추어 비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냉수리비」는 촌락의 분쟁에 대하여 왕경에서 왕을 포함한 주요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분쟁을 해소하고, 비를 세웠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따라「냉수리비」가 위치한 영일 지역 내부의 문제와 더불어 분쟁과 관련한 왕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와 관련한 시기인 5~6세기 초에 신라 왕경에서 시장이 개설되었다는 사회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시장의 개설과 유지를 위해서는 지방의 물산을 안정적으로 수급해야 했고, 당시의 지방통치체제의 한계 상 재지세력의 협조 속에서 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5~6세기의 농업생산력 증가, 운송수단의 개선에 따른 교류의 확대는 새로운 집단인 ‘富民’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들의 부각은 기존에 재지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재지수장층과 대립하게 되었고, 특히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왕경은 왕의 敎를 통해 이를 조정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왕경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는 영일 지역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가 입석된 냉수리 지역에서 발굴된 냉수리 고분은 6세기 초로 비정되는 만큼 「냉수리비」에 등장하는 節居利와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영일 지역 내에서도 새롭게 성장한 부민 집단이며, 냉수리 고분의 양식이나 부장품을 통해 북방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성장한 집단임을 살펴볼 수 있다. 이렇듯 영일 지역 재지집단의 변화 속에서 북방을 통해 신라 왕경으로의 특산품과 물산이 집산됨에 따라 이에 관여하게 되는 재지집단의 부와 이득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절거리는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냉수리 인접 지역인 흥곡리의 토착세력인 末鄒와 斯申支는 절거리의 재물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왕경으로의 물산 공급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점에 위치한 냉수리 지역에서의 분쟁은 왕경의 적극적인 관여로 이어졌고, 이러한 결정 사안이 냉수리에 비를 입석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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