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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店竹簡本『老子』硏究 : 개혁개방 정책의 철학적 정당화와 관련하여

초록/요약

1993년 10월 발굴된 곽점죽간(郭店竹簡)『노자(老子)』(이하 ‘죽간『노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판본의 『노자(老子)』(이하 『노자』)보다도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노자』로 밝혀졌고, 또 통행본 『노자』에서처럼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만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중국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98년 5월에는 죽간『노자』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행사가 두 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북경(北京)의 문물출판사(文物出版社)에서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이란 제목의 발굴보고서가 출간되면서 죽간『노자』의 면모가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고, 두 번째는 미국 다트모스대학(Darthmouth College)에서 ‘『곽점노자』국제학술토론회’가 개최된 것이다. 이 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주축으로 하여 그 다음해인 1999년 북경의 삼련서점(三聯書店)에서 진고응(陳鼓應) 교수가 주편(主編)을 맡은 『도가문화연구(道家文化硏究)』제17집이 출간되었다. 죽간『노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토대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간『노자』에 대한 중국 학계의 초기 연구는 주로 죽간『노자』가 전본(全本)이냐 혹은 초본(抄本)이냐를 둘러싼 형식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출토된 죽간『노자』를 “그 자체로 완정(完整)한 체계를 갖춘 판본으로 보아야 한다”(全本說)는 주장과 “내용으로 볼 때, 별도로 모본(母本)이 존재하고 그 모본을 누군가가 발췌한 것이 바로 죽간『노자』이다”(抄本說)를 두고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렸다. 이와 같은 형식 논쟁은 유가와 도가의 관계에 대한 죽간『노자』의 해석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죽간『노자』의 내용을 바탕으로 진고응은 『도가문화연구』에서 기존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관계를 완전히 뒤엎는 “유도동원”(儒道同源)이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의 주장은 이후 유가와 도가 및 두 학파의 관계를 둘러싼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죽간『노자』와 진고응의 “유도동원론(儒道同源論)”이 등장한 이후 중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선진철학(先秦哲學) 연구자들의 노자 철학 연구가 새롭게 활기를 띠면서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의 관계를 언급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유도동원론”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죽간『노자』가 발굴-정리-해석-발표되었던 1993년에서 1998년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이 한창 큰 성과를 내던 시기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1979년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와 결합한 것이었고, 이러한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는 ‘가난한 사회주의’에 실망하고 문화대혁명의 폭압에 커다란 좌절을 맛보고 있던 중국 지식인들에게 희망의 불빛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국가 이데올로기로써 사회주의를 온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는 모택동(毛澤東) 시절의 ‘봉건적 사회주의’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거쳐야 할 통로가 바로 개혁개방이라는 논리인 것이었다. 실질과 명분,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암암리에 벌어지기도 하였다. 개혁개방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개혁파에 맞서서 보수파는 사회주의 요소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개혁개방 이후에 벌어진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1989년 천안문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이러한 갈등은 1992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면서 표면적인 통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통치 이데올로기에 관한 상부의 결정이 중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당시 연 10%대의 고도성장을 계속하는 중국 경제의 비약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 개혁파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렇다고 개혁개방 정책이 중국인에게 장밋빛 경제 성장의 달콤한 과일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부작용도 부수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사회주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 국유기업의 사유화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 부패 문제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약화되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보완할 대책을 중국 정부는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귀를 기울였고, 공자가 중화민족의 큰 스승으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는 20세기에 들어서 두 차례 사망선고를 받았었다. 20세기 초 5·4운동이 일어나면서 망국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타도된 것이 그 첫 번째였고, 20세기 중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발생하면서 극좌 홍위병(紅衛兵)들에 의해 곡부(曲阜)의 공자묘(孔子廟)까지 훼손했던 사건이 그 두 번째였다. 그랬던 공자가 90년대 들어 부활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공자 및 유교(儒敎)와 관련된 중국 교과서의 서술이 이전과 달리 우호적인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죽간『노자』는 바로 이러한 90년대의 흐름에 잘 어울리는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2500여 년 전 당시의 중국인들이 실제로 보고 사용하던 죽간이 출토되었다는 점, 그래서 현존하는 『노자』 중에서도 제일 오래된 판본이 확실하다는 점은 고대 문화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싶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높여주었고, 문화 민족주의를 전세계에 자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면에서는 유가와 도가의 관계가,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덜 대립적, 관점에 따라서는 서로 화합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의 공존’이라는 개혁개방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필자는 간주한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유가와 도가에 대해 “도가 같지 않아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道不同不相爲謀)로 묘사한 이래 전통적으로 유가에 비판적인 학파의 대표로 간주되던 도가 철학이 공자와 유가의 부활에 마중물이 되어버린 형상이다. 죽간『노자』는 모순의 공존을 거듭 강조하는 한편 통치자의 자세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통치자의 이상적 자세로 노자 철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무위’(無爲)인데, 무위의 의미가 죽간『노자』의 맥락에서는 ‘소사과욕’(少私寡欲)으로 해석된다. 개혁개방으로 인하여 성공과 번영을 구가하는 계층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층의 부패와 비리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소사과욕’(少私寡欲)하는 리더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음을, 죽간『노자』 스스로 무덤에서 뛰쳐나와 중국 인민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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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요약

It was revealed that Guodian Laozi, a bamboo slip text discovered in Chu-state Guodian tomb in October 1993, was created at an earlier stage than any other manuscripts of Laozi previously known. Moreover, unlike other texts of Laozi that had been widely read, Guodian Laozi did not merely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Confucianism and Taoism in conflicting ways, which came to draw attentions from numerous sinologists. In May 1998, there were two noteworthy events related to Guodian Laozi. The first one was that the text of Laozi written on bamboo-slips has made on initial appearance to the public with the publication of research report with the title of Guodian Chu-state Bamboo-slips from Munmul publishing company in Beijing. The second event was tha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Guodian Laozi was held in Dartmouth College in the United States. In 1999, the professor Jin Go Eung, one of the top authorities on Taoist philosophy, was responsible for writing principal part of The Research on the Culture of Taoism published in Sam-Ryeon Bookstore in Beijing and he later published a special edition of Bamboo-slip Laozi for the 17th issue with the best selections of theses presented at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Guodian Laozi. This period can be regarded as the genuine start of the research on Bamboo-slip Laozi. The early studies on Bamboo-slip Laozi in the Chinese academic world were centered on the controversy over formality whether the Guodian Laozi is original or an abstract. The ‘Original version theory’ is based on the view that the newly discovered Bamboo-slip Laozi should be regarded as a manuscript with complete system of its own, and the ‘Abstract version theory’ is based on the view that considering the contents that constitutes the text of Bamboo-slip Laozi, an original text exists separately and this Bamboo-slip Laozi is what someone abstracted. Scholars were divided by these two arguments. The controversy over formality resulted in the controversy over interpretation, which refers to the different interpretations to the relationship of Confucianism and Taoism mentioned in the text of Guodian Laozi. In the account of The Research on the culture of Taoism, Jin Go Eung developed ‘the theory of the same origin of Confucianism and Taoism’ based on the text of Guodian Laozi, which had the outcome of completely overthrowing the conventional view of the relationship between Confucianism and Taoism. His argument that Confucianism and Taoism have the same origin made no less influence on the researches over the relationship of Confucianism and Taoism. The discovery of Bamboo-slip Laozi and Jin Go Eung‘s bringing up of ’the theory of the same origin of Confucianism and Taoism‘ marked a turning point to the studies in Taoism philosophy by the scholars around the world who were involved in the studies of Warring States period. Not only that, a situation was developed that ’the theory of the same origin of Confucianism and Taoism' must be addressed in any way when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Confucius and Laozi was discussed. The period between 1993 and 1998 when Bamboo-slip Laozi was found, organized, interpreted and presented overlaps with the period when China was in the middle of the prospering wave of Chinese economic reform. Chinese economic reform started in 1978 refers to series of economic policies that combined capitalism and socialism, which was regarded as a hope to Chinese intellectuals who had been disappointed with ‘poor socialism’ and who had been frustrated to the oppression of the Cultural Revolution. However, Chinese government did not completely give up the socialism as their national ideology. While thoroughly criticizing ‘feudal socialism’ of Maoism, China was still strongly aiming the ‘true socialism’. Chinese economic reform must be gone through in order to realize the ‘true socialism’. Conflicts among ideologies were often generated depending on which side is chosen between practicality and justification. The reformists who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economic reforms in Chinese characteristics were opposed by the conservatives who argued that socialist elements could not be diminished in any case. The ideological conflict emerged after Chinese economic reform externalized itself as the Tiananmen Square protests in 1989. The tension between reformists and conservatives ended in terms of the external governmental ideology by Chinese communists‘ officially affirming “the socialist market economy” in 14th party convention in 1992. However, it took time for the decision on such governmental ideology to expand throughout Chinese society. The rapid economic growth rate reaching 10% of China at that time gave strength to the reformists who advocated the policy of Chinese economy reform. The policy, however, did not always bring about fruitful results. Serious side effects began to follow. Polarization of wealth, problem of inequality and corruption of ruling classes generated in the process of privatization of state-owned enterprises, which had been unable to be seen in the period of poor socialism, started to appear as social problems. Based on these social conditions, it was inevitable to find a way to supplant the weakening governmental ideology. Chinese government focused on the traditional nationalism, and Confucius came to be revived as a great mentor of ’Sinocentric nation‘. Confucius had been sentenced to death for two times over 20th century. The first one was when Confucius was blamed for China’s failure during the May Fourth New Cultural Movement of China. The second one was that with the occurrence of the Cultural Revolution, even Confucius‘s tomb was damaged by Red Guard, an extreme left group. That Confucius was resurrected in the 90s. This period was regarded as a watershed in the recognition of Confucius and Confucianism, since Chinese texts’ description of Confucianism began to be transformed into favorable expressions. Bamboo-slip Laozi manuscripts corresponded to the transformations that China went through in 1990s. The fact that the Bamboo-slips that Chinese people had used and watched 2,500 years ago and that without doubt, Guodian Laozi is the oldest manuscript even among the existing Laozi manuscripts could satisfy the ego of China to boast about greatness of ancient heritages and of cultural nationalism. The contents of Guodian Laozi could desirably support the governmental ideology, so-called ‘coexistence of paradox’, reflected in Chinese economic reform in a philosophical way, since unlike previous theories, the contents depicted the relationship of Confucianism and Taoism as less contrasting but rather harmonious. It has been the established theory that Taoism represented the school hostile to Confucianism since Sima Qian in his historical writing Shiji argued that “Tao in Confucius and Taoism are so different that they cannot cooperate”. However, Taoism now precipitated the revival of Confucianism and Confucius. Meanwhile, Guodian Laozi also suggests the attitudes and manners that must be followed by rulers in a various way. In philosophy of Taoism, the virtue of a good ruler emphasized most importantly is ‘Wu-Wei’, often translated as ‘nonaction’. However, in the context of Bamboo-slip Laozi, ‘Wu-Wei’ is interpreted as ‘reducing desires’ and ‘frugality’. Chinese economic reform not merely brought prosperity to some classes, but it caused serious corruption of ruling classes and power abuses, which necessitated Chinese governmental leaders making philosophical virtue and wisdom of ‘reducing desires’ a way of life that Guodian Laozi itself was crying out toward Chines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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