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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士族의 유람과 山水空間 인식

초록/요약 도움말

국 문 초 록 과거 특권층과 종교인, 상인들에게 독점되었던 여행은 근대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른바 대중관광(mass tourism)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 대한 갈망과 집단적 실행이 근대이후에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그랜드투어’에서 일본 에도시대 상층 농민의 여행까지, 17세기 이후 동서양을 막론한 여행의 유행 현상이 발견된다. 조선시대에도 여행이 유행한 시기가 있었다. 사족층의 산수 유람이 유행한 17세기 이후이다. 이 시기 동안 수많은 여행기록과 ‘眞景山水畵’ 같은 예술품이 쏟아져 나왔고 그 작품들은 조선 후기 문화를 대표하는 성과로 상찬되고 있다. 물론 당시의 사족층의 유람은 오늘날의 여행 개념과는 다르다. 주로 ‘山水’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유교적 전통의 맥락을 지닌 문화적 행위였다. 본 연구는 조선 후기 양산된, 산수 유람기의 분석을 통해 조선 후기 산수 유람 문화가 지닌 사회·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현재 조선 후기 유람의 기록은 엄청난 분량이 남아있다. 그 수많은 기록들은 ‘개별적이고 사소한’ 일상의 편린으로 여겨져 역사학계에서는 이제까지 크게 주목하지 않은 자료였다. 본 연구에서는 산수 유람이라는 여행 형식의 유행을 조선 후기의 사회적·문화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그 합당한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조선시대 산수 유람은 조선 후기라는 시대성 속에서 진정한 의미와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 후기에 산수 유람이 유행할 수 있었던 배경과 양태를 살피고 산수 유람의 시대적 의미와 그 영향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오랜 유가적 전통에서 산수 유람은 유가적 덕목과 문장력을 함양하는 방법으로서 행해졌다. 특히 성리학자들은 산수를 天理를 체득하는 공부처로 여겨 산수에 대한 경험을 중시하였다. 15세기 후반 김종직과 그 문하의 신진 사류에 의해 유람기가 저술되기 시작하였고 士禍를 거친 16세기 후반 이후로는 曺植과 같은 처사들에 의한 산수 유람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조선전기 산수 유람은 지역의 지리·문화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그 가치를 천명하려는 사족층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하였으며 사족으로의 정체성과 은거를 지향하는 사류의 가치관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宋代 朱子의 산수 은거와 유산행적의 소개가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이후 조선 사족사회에 나타난 주자학에 대한 이해 심화와 사화의 시기에 대두된 처사들의 출처관은 산수자연에 친연적인 삶의 형태를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산수 유람이 사족의 문화 행위로서 보편화, 일상화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 호란 이후에는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여 도가 행해질 수 없는 난세’ 라는 현실 인식 속에 隱士를 추앙하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산수 유람이 더욱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 山林세력이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여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면서 은사적 출처관과 산수 자연을 벗 삼는 사대부의 문화 양태를 보편화시켰다. 17세기 이후 명말청초에 유행하던 實景을 중시한 문예가 소개되어 큰 영향을 미쳤고, 조선 산천의 실경을 묘사한 문예가 文壇과 藝苑의 주류로 떠올랐다.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 점차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갔다. 또한 장기간의 여행과 일생 동안 많은 횟수의 여행을 경험한 인물도 상당히 증가했다. 조선 후기 유람권역이 크게 확장되었지만 금강산 유람은 전 시기에 걸쳐 빈번히 이루어졌고 관련 문예물도 압도적이었다. 유람지 각각에 대한 선호는, 자연 경관적 가치보다는 지리적 접근성과 더불어 인문적, 역사적 가치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또한 각 지역에 형성된 사족사회와 그 연망의 성숙 여부와 관련 있었다. 선현의 유적에 대한 유람은 후대 문인들이 느끼는 정치적 소외감을 극복하고 학파적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의식적 행위였다. 17세기 후반이후 원거리, 장기간의 여행이 크게 늘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여행의 조건은 노비 노동력의 활용, 사족층의 緣網, 산중 사찰 이용과 승려 동원과 같은 조선 후기 사족층이 누리고 있던 특권과 관계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점차 산림 처사의 위상과 가치가 퇴조되면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山水는 은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문사들의 문예 주제로 여겨졌고 도학적 관심보다는 취향과 취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족층의 분열과 새로운 유람계층의 등장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중인·서얼층, 양민, 승려, 여성 등이 유람에 참여하였고 모두가 선망하던 유람지인 금강산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산수 유람은 산이라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왔다. 조선 후기 사족들의 유람지는 산에 집중되어 있다. 산은 중층적 의미를 갖고 있는 역사공간이었다. 산은 국가차원의 致祭 대상이었고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邑治를 수호하는 鎭山의 역할도 있었다. 조선 후기 유람자들이 늘면서 산은 사족층의 家居地 선택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李重煥이 『擇里志』에서 산수를 중시한 이유였다. 또한 조선 후기 산은 강역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체계적 이해의 대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전체 산에 대한 체계가 망라되었다. 조선 후기에 한반도의 산맥체계와 祖宗山으로서 백두산의 위상이 확립되었다. 백두산을 朝鮮中華意識의 지리적 표상으로서 묘사하였다. 한편, 사족 유람자들은 산중여행에서 사찰을 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유불의 교유와 이해, 대립의 차원을 넘어 유람자들은 산이라는 공간에 대해 새로운 담론을 생성시켰다. 조선 후기 산중으로 향한 유람자들은 사찰과 승려를 자신들의 유람을 위해 활용하면서 산에 대한 유교적 교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유람자들은 산들의 봉우리나 臺의 이름들을 유가적 의미의 지명으로 바꾸거나, 朱子의 행적을 이어받아 경치 좋은 산수를 九曲으로 설정했다. 또한 산중에 전승되던 佛家의 전승들을 합리적 고증에 의해 비판했다. 이 과정은 불가에 대한 유가의 우위를 확인하는 기회이자 유자로서 교화의 책임을 다하는 장면이었다. 또한 산에 대해 유교화가 시도된 구체적 사례로서 ‘조선의 武夷山’으로 만들려고 했던 과정을 주목할 수 있다. 청량산과 화양동에 대한 유람은 이념적이며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교적 지명을 유교적으로 바꾸고 불교 전승을 先代 儒賢의 전승으로 대체하며, 산수 공간을 조선 중화의 성지로 만들려는 시도는 산에 대한 유교화와 사족층의 영역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렇게 사족의 遊山활동은 국토의 2/3를 차지하는 산이라는 공간에 대한 지식화와 의미설정으로 연결되었다. 유람의 유행은, 조선 지식인들이 경험한 공간의 확장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체험 공간을 넘어서, 조선이라는 전체 영역을 상상하고 영역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산수 유람은 사족층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담지하면서 산에 대한 유교적, 영역적 담론을 품은 문화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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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요약 도움말

The purpose of my dissertation is to investigate the social, cultural, and political ramifications of “travel narratives,” which, contrary to the previous eras, were massively produced and widely circulated in the late Chosun period. “Travel narratives” have been regarded as one of the commonly used, traditional literary forms of the time period and thus hastidly dismissed and ignored by numerous previous historians to be a mundane and trite conventional literary form. Thus, it has not been properly investigated. Unlike the previous scholarship on the issue, my dissertation attempts to shed a new, meaningful light on the long-ignored, but significant topic of “travel narratives” as an “unconventional” story-telling, an active reflection of genuine human desire for wild nature (in particular, mountains in remote areas) and its “raw” and “real” experience through various kinds of activities such as hiking, mountain-climbing, or meditating in the open nature. They actively took part in such activities and were able to create countless beautiful and breathtaking drawings, paintings, musical pieces, and other artistic and literary works. My dissertation argues that the sudden burst for such intense outdoor, nature-centered travel experiences ironically reflects people’s desperate plea to run away from the extremely conservative Chosun society and its rigid political, cultural, and social stratification—at least temporarily. While travel narratives had been written in previous eras such as the Korea dynasty, they reached their full peak after the late seventeenth Chosun dynasty. One of the main reasons for such sensational success of travel narratives would be that the travel literary form provided an unique opportunity for Sajok(the social elite group of the Chosun dynasty)to broaden their knowledge of Confucianism and further expand the limited political and artistic horizon such as real-scenery. Travel narratives were also frequently used by the descendants of the fallen social elite to express their deepest sense of disillusionment about politics. By actively creating their own travel storytelling, the estranged social exile tried to re-create and re-establish their new identities. Due to the popularity of travel narratives, the population of those who enjoyed travel “just for the sake of travel” dramatically increased as well. At the same time, the society witnessed the sudden increase of population who traveled long distances all year or even some who decided to travel many different places as part of their life-long mission. People’s preferences for travel sites varied; however, it is worthy to notice that such preferences were often made more on the basis of geographical convenience and proximity as well as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s of travel sites, less influenced by physical beauty alone. Also people chose specific travel destinations in relation to their social network. Other reasons for increasing public attention to travel and travel narratives during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would relate to the several facts: first, servants or slaves were readily available for long-term travelers such as the social elite and wealthy Sajok; second, a wide range of intimate social network made it possible for Sajok to travel extensively. By the eighteenth century, however, travel experiences became more readily available to people across the stratified social class system. And the less privileged were able to afford along-term commitment to travels, due to the increase of the use of virtual currencies and local taverns to provide foods and lodging for travelers.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Sajok preferred mountains for their favorite travel destination because they considered mountains a key component to re-create a new historical identity of the Chosun society. Historically speaking, mountains in Korea have long been closely associated with national identity. Therefore, mountains--along with rivers--became the object of people’s constant attention, which led to the systematic analysis and better understanding of Korean mountains. In particular, Baekdu mountain firmly established its prestige as a centerpiece to Korea’s national identity. During the late Chosun period, many intellectuals/scholars claimed Baekdu Mountain to be a geographical symbol of Sinocentrism in late Chosun. The social elite Sajok’s increasing interest in mountains as their new “travel destination” caused intense clash with the existing culture of the mountain living locals, who were oftentimes social radicals, outcasts, or exiles due to their failure or resistance to conform to the traditional norms of the society. Among those social outcasts were Buddhists, who had been key players in previous eras, now lost their power and influence and became sort of social misfits in exile during the Chosun dynasty, which was firmly established on Confucianism. However, the cultural clash between Confucianism and Buddhism (or between the Chosun’s social elite and the social outcast) provided an unlikely opportunity to create a new and different kind of creative cultural dialogue. My dissertation argues that the travel narratives of the late Chosun society eye-witnessed such unique convergence of two distinctly different ideologies. It also claims that travel narratives became a powerful cultural tool to share a significant historical experience that is both distinctly different and yet completely Korean and actively promote a positive mutual understanding across political, cultural, social, and even religious differences. In conclusion, I argue that Sajok’s frequent travels to and fascination with remote mountains and rivers represent their deepest yearning for a better future and more open and humane society. The social elite Sajok, through their private travel experiences and their writings, enriched their own hearts and minds and could imagine a bright, positive, inclusive, new world far beyond the exclusively conservative Chosun society. Their personal travel experiences and their intimate travel narratives eventually created positive venues for society to connect to people from all walks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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