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 미국유학 여성지식인의 현실인식과 사회활동
Experiences, Thoughts, and Activities of Korean Female Intellects studied in U.S.A. in 1920s~1930s
초록/요약
Modern school education of Korean women had begun at Ewha girls' school founded by U.S. missionary named Mary Scranton in 1886. Former ages women education had been in existence, but it was home education. Korean women trained by modern education had started to activate from the 1920s through participating at 3.1 independence movement systematically. In the 1920s, newspaper and magazine publishers had open to be established and light up these modern educated women, called new women. New type women were located at pioneer group never existed before. They had sense of duty of overcoming double oppressions as colonial people lost their own rights in their land and women had no equal rights with men in patriarchal system. These female intellects had tried to accomplish Korean national independence and women's liberation even if estrangement between ideal and reality. On this dissertation, I had studied Korean female intellects' movements including their actual condition, experiences, thoughts, activities through and after their studying and living in U.S.A. and their travelling abroad in the 1920s∼1930s. Korean female students studying in U.S.A. were few comparing to Korean women studying in Japan during colonial period. But their social activities and influencing power could match or stand out conspicuous for Korean women studying in Japan. Especially after 근우회(Geun Woo Whoi) was disorganizing and socialist including some women studied in Japan were fleeing, imprisoning, and concealing themselves in the 1930s, female intellects studied in U.S.A. had continued their rural and social work, and movement for elevating Korean women's life and position in Seoul and countries. During colonial period and after 8.15 Korean liberation, many active and competent women had experience of studying in U.S.A. Although their contribution and influence on Korean society, they had not been paid attention sufficiently and seriously. Therefore study on them is necessary, worthy and meaningful. Also this will be the background of understanding their tendency and movement to contribute to the founding of south Korea after Korean liberation. On this thesis, I had studied on Korean Women studied in U.S.A. in the 1920s∼1930s relating their personal character and interest to their mutual experiences and movements. From the 1920s, restriction of studying in U.S.A. had released in a measure. But in the 1940s, regulation of that had resumed strictly. So in the 1920s∼1930s, about 100 Korean women had made passage to U.S.A. to study. Most of all were from Methodist Episcopal Church missionary school, especially Ewha girls‘ school, and teachers of that and Ewha woman's college. Korean female intellects had an opportunity of experiencing modern western civilization, rediscovering value of Korean culture heritage and confirming Korean national identity during studying in U.S.A. They had not only experienced modern learning and social system in U.S.A. but also interested in various nation and civilization in Europe and the Soviet Union on the point of view of comparative culture. As a result of pursuing development model suitable for Korean society, they had paid attention to Denmark rural rehabilitation and tried to apply to improve lack of education opportunity, women's low status and position, and rural impoverishment and despair in Korea. Korean women's experiences of studying in U.S.A. had helped to build up wide outlook on the world and reconfirm Korean national culture consciousness not to tend to American style paradoxically. Female intellects also paid attention to foreign female's social status and life while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and participating in international conferences. They thought that educated women including them could contribute to the improvement of Korean women's social status and life by growing leadership and putting more effort to enlightenment and education of Korean women. Korean women studied in the U.S.A. thought that independence of nation, distribution and equal possession of land, decrease of tenant's fees, utilizing cooperatives, expansion of education, and mental alerts of people were needed to resolve rural problems. But under the Japanese colony, they thought that the only feasible and legal measure was the expansion of education and enlightenment based on Denmark's rural revival movement model. They thought that farm village activists were needed for rural movement. They tried to train not only educated women but also village women. Especially they thought that it would be efficient to select and train women from farm villages, return them to their hometowns, and implement farm village enlightenment and activities through them. Therefore, Korean style 농민수양소(Farmer Development Center) and 농촌여자지도자수양소(Farm Village Female Leadership Development Center) were established. They also implemented cooperative movement which aimed for economic status improvement also took place. This was meaningful not only in contributing economically to the life of farm families but also in gaining farm women's economic power for improving women's rights. 경성여자소비조합(Gyeongseong Women's Consumers' Cooperative) was also established for urban women. This was called "Women's Economic Movement" because it was not only economically helpful to urban housewives' family management but also an opportunity for women to accumulate economic experiences. After returning from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female intellects had returned to teaching and initiated diverse movements through different kinds of women's associations. They also had focused on writing and translation for these activities. Social activities by female intellects studied in U.S.A. had meant a lot that they were the women's activities for Korean women within the legal boundaries during the 1930s when there were actually not many women's movements. However, the limitation of them was that they could not help but cooperate with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continue their undertakings or movements because wartime mobilization and all-in policy was reinforced in the late 1930s. The meanings of this dissertation can be found in following grounds. It first shows the fact that educated female intellectuals continuously put effort to social movements even under the pressure of both Japanese colony and patriarchal social structure. It also shows the traces and activities of female intellectuals in these movements, which has not been disclosed before. Furthermore, it figures out the origin of persons who had taken major parts in establishing the Republic of Korea after liberation, and had been the main actors of the female society.
more초록/요약
한국여성의 근대식 학교교육은 1885년 조선에 입국한 미국인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가 1886년 설립한 이화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여성교육은 존재했지만 가정교육이었고, 학교와 같은 공식교육기관에서 집단적으로 실시된 적은 없었다.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3.1독립운동에 참가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이후인 1920년대부터였다. 1920년대 한국사회에 여러 언론 매체가 생기면서 이들을 주목하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근대식 학교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역사상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신여성들로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이자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으로서 이중의 억압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도 선구자로서 여성 해방과 민족 독립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본고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 아래 1920∼30년대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전개했던 여성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현실인식과 사회활동을 조명하고자 했다. 미국유학 여성들은 일본유학 여성들에 비해 소수였다. 그러나 그 활동과 영향력에 있어서는 일본유학 여성지식인에 필적하거나 월등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일부 일본유학생을 포함한 사회주의 여성지식인들의 활동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도,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은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가운데는 미국유학 출신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부족한 형편이다. 따라서 이들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미국유학 여성지식인에 대한 고찰은 해방 이후 여성지식인들의 경향과 동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일제강점기 시대정신과 세계사조, 사회운동의 배경 아래 전개되었던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의 인식과 활동을 각 개인의 특성과 활동, 이들 집단의 공통의 경험과 활동에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했다. 1920년대 미국유학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고 1940년대 다시 강화되었다. 따라서 1920∼30년대 약 100여명의 한국여성이 미국에 유학했다. 이들 대부분은 선교회 여학교 출신으로 특히 이화학당 또는 이화여전 출신이 많았으며, 이화학당의 여교사들이 많았다. 한국여성의 미국유학은 여러 면에서 이화학당 당국과 미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선교사였던 미국인 여교사들의 영향이 컸다. 여성지식인들은 미국유학을 통해 근대서양문명을 체험하는 한편 한국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민족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근대적인 학문과 사회제도를 경험하는 한편, 비교문화의 시각을 가지고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소련 등 다양한 문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에 적당한 발전모델을 모색한 결과 덴마크의 부흥에 주목하고 이를 한국사회의 교육, 여권, 농촌문제 개선에 적용하고자 했다. 여성지식인들의 미국유학 경험은 역설적으로 미국적인 것에 편중되지 않고 폭넓은 세계관과 함께 민족문화의식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지식인들은 미국유학과 세계여행, 국제대회 참석 과정에서 외국여성들의 지위와 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포함하여 교육받은 여성들이 지도자의식을 가지고 일반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노력함으로써, 한국여성의 지위와 생활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여권향상은 여성의 교육과 경제적 독립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여성의 보통교육 확대와 함께 실업교육과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은 농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독립, 토지 분배와 토지의 균등한 소유, 소작율의 인하, 협동조합의 활용, 농민교육의 확대, 농민의 정신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가운데 일제식민지지배 하에서 현실적이고 합법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개선책은 덴마크의 농촌부흥을 모델로 한 교육 및 계몽의 확대에 있다고 보았다. 여성지식인들은 미국유학에서 귀국 후 교직에 복귀하는 한편 기존의 조선YWCA연합회 이외에 여러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했고, 저술과 번역 작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김활란은 이화여전의 학감, 부교장, 그리고 교장의 중책을 맡아 한국여성고등교육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임영신은 자금난으로 폐교의 위기에 있던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학교를 발전시켰다. 넓은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신축하여 캠퍼스를 조성하고, 미국에 학교후원재단을 설립했다. 김활란과 임영신은 여성고등교육이 한국인에 의한 한국적 여성교육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했고, 이화여전과 중앙보육학교를 여자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은 스스로 농촌계몽과 농촌사업을 전개하고 모범촌 건설을 시도하는 동시에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농촌활동가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신여성을 농촌활동가로 양성하는 한편, 각지의 농촌여성들을 선발·연수를 통해 고향에 돌려보냄으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농촌계몽과 농촌사업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모델로 한국식 농민수양소,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가 설립되었다. 한편 경제생활개선을 목표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농촌 가계에 경제적으로 기여하는 동시에 여권향상을 위한 농촌부녀의 경제력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도시여성을 대상으로 경성여자소비조합이 조직되었다. 이는 도시 주부의 가계운용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여성이 경제활동 경험을 쌓는다는 의미에서 여성경제운동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직업부인협회와 가정부인협회를 조직하여 도시주부의 생활개선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경성자매원 산하에 강습소, 영아관, 가정료와 같은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고, 교육·계몽, 보건·의료, 생활개선, 아동보호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의 사회활동은 1930년대 이렇다 할 여성운동이 없었던 가운데 현실에서 가능한 합법적 방법으로 이루어진, 여성을 위한 여성의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말부터 전시 총동원·총력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위와 같은 사회적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일제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본고는 미국유학 여성지식인들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와 가부장제 사회구조라는 이중적 억압과 한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회활동에 매진 해 온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과 활동을 조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본고는 해방 후 건국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여성계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의 원류를 파악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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