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건식의 중국 문학 연구에 대한 비교문학적 고찰 : 중국 속문학의 연구를 중심으로
- 주제(키워드) 양건식 , 중국 속문학 연구 , 비교문학 , 일본 , 영향 , 근대 동아시아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 지도교수 김경수
- 발행년도 2011
- 학위수여년월 2011.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46932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의 논문은 저작권보호를 받습니다.
초록/요약
본 연구는 양건식의 중국 속문학 연구를 중심으로 그의 중국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에 미친 일본 학계의 영향을 비교문학적 고찰을 통해서 밝히고자 한다. 양건식은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무렵 한국에서 중국문학을 소개한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근대 한중 문화교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양건식의 중국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에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처음부터 중국보다 일본과 더 많은 연관 양상을 보이고 그 후에도 일본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뚜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것에 주목하여 양건식의 중국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 가운데 일본의 중국문학연구와 연관 가능성이 가장 높은 속문학 비평문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 이들과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 저서에 대한 실증적인 비교 고찰을 통해서 양자 간의 수수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기초로 하여 양건식의 중국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에 미친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의 영향을 규명한 후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결합하여, 양건식이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 성과를 많이 수용한 원인과 그가 중국문학 전신자로서의 능동적인 면모를 고찰하고자 한다. 중국 속문학 연구 및 번역의 경우, 양건식이 중국 속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을 시작한 데에 있어서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가 외래적 영향 요인으로서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사사카와의『지나소설희곡소사』, 『지나문학대강 · 탕임천』,『지나문학사』는 양건식이 중국 속문학 연구의 초기의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라고 본다. 그리고 양건식이 1917년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문학 연구를 시작한 것과 처음부터 중국 고대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특별히 희곡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것은 이마제키 텐보오(今關天彭)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본다. 초기 뿐 아니라 양건식의 중국 속문학 연구 활동의 전반에 일본 학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중국 속문학에 관한 대부분 비평문은 일본의 관련 저서나 논문을 거의 표절할 정도로 수용한 것이며 이들 글에 양건식 개인의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많은 중국 속문학 작품을 번역할 때 일본어 역본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곧 양건식이 무의미한 모방자임을 뜻하지 않는다. 이들 현상의 출현은 당시 동아시아의 시대적 환경 및 중국 속문학 연구의 역사적 상황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양건식이 중국 속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에서 나타난 전신자로서의 능동적인 면모이다. 양건식이 중국 소설서류에 대한 지대한 애착 때문에 당시 한국에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중국 속문학의 번역과 연구에 종사한 것에서 그의 능동성을 보이고 그는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와 달리, 중국 고대문학 가운데 전통 한학에 속해 있었던 중국의 시 · 문을 배척하고 희곡과 소설 등 속문학만을 연구 번역한 것과 전통 한학과 한학가를 비판한 것에서 그가 능동성을 나타낸다. 양건식은 중국 신문학혁명의 소개와 현대문학 작품의 번역 활동도 일본학계와 연관성이 있다. 그가 1921년까지 중국의 신문학혁명, 신간정보, 속문학 연구 동향 등 문단 현황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일본의 간행물, 특히『지나학』에 발표된 아오키의 글을 통해서였다. 상당한 중국어 독해 실력을 갖춘 양건식이 일본을 거쳐 중국 신문학혁명 및 현대문학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당시 여러 가지 시대적 환경의 제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5 · 4 운동전까지 중국 국내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던 신문학혁명은 그 정보가 한국에까지 많이 알려질 수가 없었다. 더욱이 당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고 국내의 사정이 매우 복잡했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중국의 신문학혁명에 관심을 돌린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에서 양건식에게 중국의 잡지보다 일본의 간행물에 발표된 중국의 문단 현황을 소개한 글이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해서 볼 것은 양건식이 일본학자들이 중국 신문학혁명 및 현대문학에 대한 보편적인 무관심과 달리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아오키 마사루(青木正兒)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마제키, 아오키 등 그의 중국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에 영향을 많이 끼쳤던 일본학자들과 달리, 중국 현대문학 작품을 많이 번역한 것에서도 그의 전신자로서의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양건식은 중국문학 연구 및 번역 활동에서 일본의 연구 성과를 많이 수용했다. 하지만 그는 근대 한국에서 제일 먼저 경학(經學)과 시 · 문 등 아문학(雅文學)의 연구를 경도된 전통 한문학관의 속박과 개화기의 효용론적 문학관에서 벗어나, 중국문학의 근대 학술적 연구 및 번역을 시도한 것은 그가 이 분야의 훌륭한 선구자임을 말해준다. 또 양건식은 한국 문학의 시대적 요청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more초록/요약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using the method of comparative literature study to investigate the influence of Japanese academic circle on Yang Geon sik’s research of Chinese literature as well as his related translations. Yang Geon sik is the leading figure in the translation and research on Chinese literature in Korea during1910~1930, his work is of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on the cultural communication between China and Korea in modern times. There is a feature in Yang Geon sik’s Chinese literature research, which is the correlation with Japanese academic circle from beginning to end. This paper starts form this phenomenon, takes his review essay about Chinese folk literature which has the highest probability of being correlated with Japanese’s research on Chinese literature as studying object, and investigates the interconnection between Yang Geon sik’s and Japanese academic research on Chinese literature through the comparative study of his and Japan’s concerning works. In the early days of Yang Geon sik’s research of Chinese folk literature, as an external factor, the research of Chinese literature in Japan played an important role. The early Japanese works on Chinese novels and drama history was his major reference material, and the reason why he began this study in 1917 was possibly that he had certain relationship with Imazeki Kamimori(今關天彭)who owned a post in Chosun Government-General. It was not only in the early stage, but also during the overall process of his research on Chinese folk literature that he was heavily influenced by Japanese academic circle, because in most of his review essay about Chinese folk literature, we can see that he assimilated lots of research findings of Japanese academic circle, we can even say that it is plagiarism. In addition, there is a possibility that he had referred to Japanese version when he translating the Chinese ancient folk literature works. However, this does not mean that Yang Geon sik is a valueless follower, since these phenomenons is due to the environment at that time and the history situation of Chinese folk literature study to a great extent. Notably, Yang Geon sik played a dynamic role in this activity. He started this study before any other Korean people did, and his study was also different with Japan’s in that he criticized the traditional sinology, repelled the Chinese classic poetries and essays as well as other works that once were subject to the traditional sinology. All of these justified his dynamic role. Yang Geon sik’s introduction of Chinese new literature revolution and his translation of contemporary literature also have correlation with Japanese academic circle. Until year of 1921, his understandings of Chinese literature circle’s situation such as the new literature revolution, the new journals issuing information and the Chinese folk literature studying trend etc. were obtained from Japanese publications, especially the journal named《Shinagaku》. The reason why he could get the information of Chinese literature circle till 1921 indirectly from Japanese publications is because of the history condition. In 1919, before the May Fourth movement, the new literature revolution was proposed by some professors in Beijing’s universities, its propaganda was no more than a few journals issued in Beijing area, so it hadn’t formed the influence on entire China. The real productions of new literature revolution were not mature, and were very few before 1920. Moreover, Korea experienced the March1st movement in 1919, its domestic situation was rather complex, with this background, the Korean intellectuals had little energy on Chinese new literature revolution and contemporary literature works which had relatively weak influence. However, at that time, Japanese intellectuals kept close communication with China, they were more familiar with Chinese literature circle’s situation, and they also published some related articles. With the background that Korea was the colonial of Japan at that time, obviously It was easier for Yang Geon sik to come into contact with Japanese journals. Therefore, there was no wonder that Yang Geon sik could get information in directly from Japan. Nevertheless, Noticeably, Yang Geon sik’s attitude towards Chinese new literature revolution and contemporary literature was in hospitable, but he chose to translate Aoki Takako(青木正兒)’s articles who positively evaluated the new literature revolution. Besides, he was different with Aoki Takako(青木正兒) and Imazeki Kamimori(今關天彭)who influenced him greatly, he translated plenty of modern Chinese literature works, from these two points, we can also see the dynamic role he once played. In conclusion, although Yang Geon sik’s Chinese literature study and related translation adopted plenty of Japanese research findings, he was the first Korean scholar who broke away from the constraints of utility theory and traditional sinology which focused on poetries and essays as well as Confucian classics to study Chinese literature and translate the concerning works with academic research method in modern times. Furthermore, his effort in response to the requirement of Korean literature of that time is worthy of appro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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