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선전 기획가 자끄-루이 다비드 : 프랑스 혁명기 회화와 축제를 중심으로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사학과
- 지도교수 백인호
- 발행년도 2009
- 학위수여년월 2009. 8
- 학위명 석사
- 학과 일반대학원 사학과
- 실제URI http://www.dcollection.net/handler/sogang/000000045537
- 본문언어 한국어
- 저작권 서강대학교의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초록/요약
본고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기의 화가이자 정치가로 활동했던 자끄-루이 다비드의 회화와 축제를 분석해 봄으로써 그가 혁명 시기 동안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활용해 정치 선전 기획가로 살았음을 살펴보는 데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다비드 그림 작품을 바탕으로 그림의 의미 해석을 통해 다비드를 살펴보는데 그치고 있다. 특히 다비드에 대한 연구는 다비드의 혁명 이전 작품들이 정치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문제를 두고 미술사학계에서 견해가 두 갈래로 나뉘어 논쟁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그가 정치적으로 순수했다는 주장이 로버트 허버트(Robert Hervert), 아니타 브루크너(Anita Brookner), 미셸 레베이(Michel Levey)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팀 클락(Tim Clark), 토마스 크로우(Thomas Crow), 다비드 캐리어(David Carrier)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비드가 혁명 이전부터 그의 정치적 사상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본고는 토마스 크로우와 다비드 캐리어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혁명 이전부터 다비드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음을 그의 회화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혁명 시기 다비드가 정치 선전 기획가로 활동했음은 혁명 시기 동안 그렸던 회화와 그가 기획한 혁명 축제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본고는 회화와 축제 분석을 통해 다비드는 혁명 시기 동안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정치 선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치 선전 기획가였음을 보이고자 한다. 다비드는 구체제 말기인 1780년대 후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브루투스에게 아들의 시신을 가져가는 릭토르들>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그림을 통해 표현해내고 있다. 이 작품들의 충격적 구성과 메시지는 당대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켜 아카데미로 부터는 비난을, 급진적 비평가들에게는 찬사를 받았다. 본고는 혁명 이전 다비드는 자유주의 클럽에서의 활동을 통해 자유주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혁명이 다가올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이를 자신의 그림에 표현했다고 보고 있다. 혁명이 시작되면서 다비드는 체제에 봉사하는 예술가로서가 아닌,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정치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혁명의 사건들에 대한 그림을 의뢰 받은 다비드는 실제 사건과 인물을 그의 의도에 맞추어 변형시키거나 창안해 매우 극적으로 표현한다. 다비드가 그린 혁명의 역사화는 단순히 당대 사건의 기록화가 아닌, 다비드의 정치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테니스 코트 선언>, <마라의 죽음>, <바라의 죽음>은 혁명의 진행과 더불어 더욱더 적극적으로 그림을 정치적 선전을 위해 활용하는 다비드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혁명기간 동안 정치 선전 기획가로서 다비드의 활동은 그림에서 그치지 않고 축제 기획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비드는 정부주도 축제들의 기획을 맡아 혁명의 이상과 공화국의 정신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상징과 우의를 통한 다비드의 축제 기획이 지닌 정치성은 당대에 가장 성공적인 축제라고 평가 받은 ‘공화국의 불가분성과 통합을 위한 축제’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지방의 자율권을 배제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동시에 동일하게 거행된 ‘최고 존재의 축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국민공회 의원이기도 했던 다비드는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당대 주요 사건에 대한 그림 제작과 정부 주도의 축제 기획을 통해 혁명 정부의 정치 선전을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했다. 어떤 말이나 글보다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정치적 메시지가 일반 대중에게 의미 전달이나 주입에 있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혁명에서 다비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본고는 혁명 이전부터 예술 활동과 자유주의 클럽에서의 교류를 통해 다비드가 정치색을 지녔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비드가 혁명 기간 동안 핵심적인 정치적 위치에서 자신이 지닌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회화와 축제를 정치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치 선전 기획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가로서나 실무자로서의 축제 기획자가 아니라 혁명기의 대표적인 정치 선전 기획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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