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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좌·우 언론인의 연대와 분열 : The Combination and Disruption of Left-Right Journalists after the Liberation of 1945 : A Research on The Free Press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대학원
  • 지도교수 최기영
  • 발행년도 2008
  • 학위수여년월 2008.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사학과
  • 식별자(기타) 000000108486
  • 본문언어 한국어

목차

해방직후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지식인들, 그 중에서 언론인들의 노력과 좌절을 『자유신문』과 그 편집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자유신문』은 1945년 10월 5일 정인익, 이정순을 비롯한 『매일신보』 출신의 언론인과 정진석 등이 만든 同人紙였다. 초기 편집진의 체계는 委員制의 수평적인 구조였다. 창간 당시에 정진석이 편집인·발행인 및 주필을 겸하여 신문 논조를 주도하였다. 이는 매신계의 친일성 논란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국가의 모습이 정진석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가야한다는 것을 창간 동인들이 인식하고 동의한 결과였다. 『자유신문』은 국제적인 호의를 바탕으로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민족 내부적 역량 강화를 위해서 문화적 소양을 증대해야 함을 역설하며, 야구대회를 주최하는 등의 구체적인 문화·체육 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1946년에 접어들면서 신탁통치 논쟁을 전후로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정진석과 배은수는 좌파적 논조를 오히려 강화시켰다. 일시 민족적 관점에서 반탁을 주장했던 신문은 찬탁을 지지하게 되는데, 이는 공산당의 노선을 따라서가 아니라 『자유신문』의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있던 국제적 승인을 전제로 한 현실적인 대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파적 논조가 강해지고 찬탁을 표명함에 따라 대외적으로 『자유신문』은 좌파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문사가 우익청년단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신문 발행 부수가 주는 등의 경제적인 문제에도 봉착하는 위기 상황이었다.
정인익과 이정순 세력은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진석으로 대표되는 신문 내 좌파세력을 일소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신익희를 사장으로 영입하고 친일 인사들의 경제적 도움을 받게 된다. 동시에 위원제를 폐지하고 이정순을 편집국장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내세우면서 정진석과 배은수를 몰아내었다. 1947년 이후 『자유신문』을 떠난 정진석과 배은수는 좌익 활동을 강화했고 남은 정인익과 이정순 등은 신문을 완연한 우파지로 탈바꿈시켰다.
『자유신문』과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해방정국을 주도하지도 않았고,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신문』과 그 편집진들을 통해 해방직후의 혼란과 대립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도 볼 수 있었고, 동시에 정세 변화에 따라 그 가능성이 좌절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좌우합작을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꿨고 그것을 위한 노력의 수단이자 첫 번째 결실이 바로 『자유신문』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중반부터 분단직전까지 계속 이루어졌지만, 그 실패는 이미 1946년 초에 일차적으로 예견된 것이고 『자유신문』의 변화 과정이 한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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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After the liberation of 1945, most Koreans desired their own new nation. I focused on The Free Press and it''s editors, who as intellectuals also wished new Korean government. The Free Press was launched at October 5th in 1945. Journalists from The Daily Press and Jung Jinseok had founded the newspaper. It was a coterie newspaper and was organized on the horizontal committee system. At the beginning, Jung Jinseok was the chief editor and publisher of the press. He held that new Korea will be a progressive democratic republic and other members agreed it. The Free Press maintained the Left-Right collaboration with returning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from abroad and an international approval. It also focused on increasing Korean people''s cultural power for strengthening their internal capability. Therefore, the press sponsored many cultural events and sports games like the baseball game of Korea vs US Army. In 1946 Left-Right conflict were being intensified under the trusteeship controversy. At that time, Jung Jinseok and Bae Eunsu trengthened the Left tone of The Free Press. They agreed the trusteeship because it was based on an international approval and an alternative plan of the building up new Korea. However, The Free Press was understood the Left press and was attacked by the Right groups. It also came to a economic crises with decrease of subscription. Jung Inik and Lee Jungsoon attempted to drive off the Left group in The Free Press. They incorporated Shin Ikhui as the president of the press and got financial aids from the pro-Japanese groups. The press abolished the committee system. Lee Jungsoon became the editor and publisher, while Jung Jinseok and Bae Eunsu left the press. After 1947, The Free Press was completely changed the Righ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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