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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年代 中國 關內 獨立運動과 天道敎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대학원
  • 지도교수 최기영
  • 발행년도 2007
  • 학위수여년월 2007.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사학
  • 식별자(기타) 000000104252
  • 본문언어 한국어

목차

이 논문은 천도교 민족운동사와 중국 關內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이다. 필자는 崔東旿의 활동을 중심으로 임정을 비롯하여 상해·북경지역에서 전개한 천도교인들의 독립운동을 조사해보았다.
崔東旿는 1892년 6월 22일 平北 義州郡 月華面 麻龍洞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3년 여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는 천도교의 진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실천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의 일원으로서 그에게 부여된 민족적 의무 또한 올바르게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덕분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열성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3월 2일 崔安國과 함께 의주 남문 밖 市街에서 군중들을 지도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3일에는 기독교와 공동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獨立民會를 결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간사에 피임되었다. 3월 4일 양실학원에서 다시 시위운동을 전개하던 중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어 천도교대표의 파견을 요청해오자 최동오는 의주대교구장 최석련 및 선천대교구장 이군오의 후원약속을 받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11월에 의주군조사원이 되었고, 같은 달 14일에는 내무부 참사가 되었으며, 1920년 3월 4일 내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임정활동은 크게 여섯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그는 당시 안창호가 주력하고 있던 선전활동을 보좌하였다. 둘째, 당시 임정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최동오는 천도교단에 의뢰하여 임정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자 하였다. 셋째, 국내 천도교 독립운동세력과 임정 간의 연락과 교섭업무를 담당하였다. 넷째, 임정 내에서 천도교의 권익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섯째,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을 결집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하였다. 여섯째, 왕삼덕ㆍ안정근ㆍ이용과 함께 임정의 명령을 받고 북간도에 가서 그동안 각축을 벌이던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북간도 방문을 마치고 상해로 귀환할 당시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은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곧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은 지역적으로는 상해와 북경에, 정치적으로는「아 동포에 고함」의 선언 발기인으로 참여한 그룹과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한 그룹으로 分立되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의 反정부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옹호세력에게 직접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종교활동을 통해 교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관내지역 독립운동자들과의 그간의 오해를 풀고 친목을 도모하고자 손병희 壽辰祝賀會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로써 그동안 분립되어 있던 교인들 간의 통합을 이루고, 아울러 관내지역 독립운동세력들과도 화목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여 그를 비롯한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의 정치적 재기의 길을 열었다.
1921년 5월 19일 최동오는 안창호가 주도하던 국민대표회 상해기성회에 참여하여 기성회 위원으로 피임되었고, 위원들 가운데서 재무담당자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개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교회에 자금후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자금모금 도중 그동안 그와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을 후원하여주던 최석련ㆍ이군오 등의 후원세력이 체포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써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그는 신숙과 함께 손병희를 상해로 망명시켜 국민대표회의를 성사시킨 후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임정옹호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상해에서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교인들과 함께 북경으로 그 기반을 옮기게 된다. 또한 국민대표회의 성사자금과 후원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도교인들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만주로 가지만 결국 그 시도도 좌절되고 만다. 다시 사방으로 해법을 모색하던 중 북경에 傳敎室을 설치하여 그동안 단절된 국내교회와 교통하고, 국외포덕비라는 명목으로 자금후원을 받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직접 국내로 가 경성의 중앙총부로부터 매년 보조금 3,600원과 특별창립비 2,000원의 후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자금으로는 국민대표회를 성사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북경전교실 건축을 명분으로 국내 천도교회로부터 자금후원을 얻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그는 북경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과 연대하여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진재가 발생하자 在東京地方鮮人罹災者慰問會를 조직하여 동경지역의 한인들을 구휼하였으며, 아울러 김원봉의 의열단과 동경 등지에서 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의열단원 구여순의 자금모집계획과 국내거사를 도왔다. 또한 북경지역 독립운동자들과 연대하여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문제와 미국인 허버트 웰취(Herbert Welch)가 조선인을 모욕한 사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김세준, 심천, 한진산, 이민창 등과 북경의 한인들을 망라하여 북경한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북경지역의 독립운동자를 도우며, 이념ㆍ지역의 차이로 대립하고 있던 북경지역 韓人들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1925년 1월 20일 러시아가 일본과 러일협약을 맺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철회와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승인하자 한교동지회가 주최하는 在留鮮人有志大會에 참석하여 경성실행위원에 피임되었다. 한편 관내지역에 쇠미해져가는 천도교 항일독립운동자를 양성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관내지역 천도교인들과 天道敎靑年儉學獎勵會를 발기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을 모색하였으나 이 일이 日帝에 발각되어 일제의 엄중조처로 더 이상 북경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의 진행에 한계를 느끼고 1925년 거점을 만주로 옮겼다. 이로서 그의 관내지역 독립운동은 終焉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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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This thesis lays stress on the independent activities of the Koreans in China who believed in Cheondo religion, which hasn''t been dealt with in the history of the Cheondo religious racial movement and independent movement in China so far. In this aspect I tried to bring a focus to the independent activities in Shanghai and Beijing of those who believed in Cheondo religion by examining Choi Dong-oh''s activities.

Choi Dong-oh was born in Pyonganbuk-do, northern province of Korea, on June 22th, 1892. He became a member of Donghak in the summer of 1903. He thought the truth of Cheondo religion would be realized through not only religious practice but also discharging racial duty. With this strong faith h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independent movement. He led a demonstration in Uiju on March 2nd with Choi An-guk. On March 3rd he organized Dokripminhui to cooperate with the Christian groups. He was appointed as a manager in this organization. On the following day, he was arrested and confined by military policemen, demonstrating against Japan.

On September 11th, 1919,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was established and Choi Dong-oh decided to participate upon requesting dispatch of a delegate of Cheondo religion. His main activitie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are as follows; first he assisted the propaganda activities of An Chang-ho, second he arranged financial aid of religious association of Cheondo, third he was in charge of contacting with independent movement groups and the government, fifth he politically gathered the people who believed in Cheondo religion in China, lastly he unified several independent movement groups in rivalry in Kan-do region with Wang Sam-deok, An Jeong-gun and Lee Yong.

However, when he return to Shanghai from Kan-do, the people believing Choendo religion faced political adversity. Immediately Cheondo religious people in China divided into Shanghai and Beijing regionally and politically. Moreover, they were under oppression of Rhee Syng-man''s pro-government group. To overcome this adverse situation, he held a big anniversary of Son Byong-hee with a purpose of unification of the religious groups and the independent movement groups as well. This worked effectively, and the religious and independent movement groups divided recovered their political energy.

On 19th May, 1921, Choi participated in the Shanghai branch of Kukmindaepyohui led by An Chang-ho, and was appointed as a committee member and elected as financial staff. He contacted domestic churches for financial help. However, this fund raising activity resulted in the arrest of the supporters, Choi Seok-ryon and Lee Kun-oh. Having a hard time, he planned to send Sohn Byong-hee and Sin Suk to Shanghai and accomplish Kukmindaepyohui successfully and then have him as the president. However, his plan failed. In this situation he wasn''t able to stay in Shanghai becaus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group''s criticism, so he moved to Beijing. Then he moved to Manchuria where Cheondo religious people wielded power for financial aid and political support, but this try also went wrong. He finally decided to ask financial aid to the domestic churches disconnected so far. He went to Korea and succeeded in annual support of 3,600 won and special support of 2,000 won. However, the amount was short for the Kukmindaepyohui. He once more asked domestic churches and was able to get some more financial support as building cost nominally.

After the Kukmindaepyohui was broken off, he continued the independent activities cooperating with groups in Beijing. When the great earthquake broke out in Kwandong area in September, 1923, he relieved the sufferers organizing aid group. Meanwhile he arranged and helped independent movement abroad and domestic. He discussed on the massacre of Koreans during the Kwandong great earthquake and Herbert Welch''s humiliating a Korean. He also organized a club of the Koreans in Beijing and supported the independent movement activists there, and promoted the friendship among them. On January 20th, 1925, when Russia concluded an agreement with Japan and withdrew their support for the Korean independent movement, he was appointed as a committee member of Hangyodongsihui. Meanwhile he launched a committee of sponsorship for the youth in Cheondo religion. He tried to seek effective strategy of the group, but it was detected by the Japan. In this situation, he moved to Manchuria in 1925, feeling difficulties of independent activities. His independent activities came to an end at t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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