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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末ㆍ高麗初 政治秩序의 再編硏究 : A Study on the reorganization of the political order in the Late Silla and Early Koryo Periods

  • 발행기관 서강대학교 대학원
  • 지도교수 이종욱
  • 발행년도 2007
  • 학위수여년월 200702
  • 학위명 박사
  • 학과 및 전공 사학
  • 식별자(기타) 000000103478
  • 본문언어 한국어

초록/요약

이 연구는 新羅末·高麗初의 전환기에 이루어진 정치질서의 재편과정을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문제를 대립보다는 調和, 변화와 지속의 균형관계, 개별 사실과 전체 시대상과의 유기적 관계 등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주목하였다. 제 2장에서는 신라말의 혼란기에 재등장하는 知諸軍事制를 통하여 정치질서의 재편과정을 살펴 보았다. 新羅末·高麗初에 농민반란을 계기로 시작된 사회변혁기에 재등장한 것이 지제군사이다. 신라 중대를 전후한 시기에 있었던 지제군사는 지방의 변란을 진압하기 위해 행정관적 성격의 지방관에게 군사권을 겸하게 하였던 임시적 성격의 직책이었다. 그런데 신라말에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지방에서의 반란이 빈발하게 되자, 중앙정부는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지제군사직을 부활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는 행정관적인 지방관에게 군사권을 겸하게 하였거나, 아니면 지방의 반란을 진압할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할 때 이 직책을 부여하였다. 지방관으로서의 지제군사 제도는 신라뿐만이 아니라 고려와 후백제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신라말의 지제군사는 시행 초기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를 이용하여 지방관이 호족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로서 그 성격이 변모하였다. 지방관이 지제군사의 직책을 이용하여 호족으로 성장한 경우에는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친신라와 반신라의 입장을 언제든지 바꾸었을 것이다. 제 3장에서는 지방 단위에서는 정치질서의 재편을 위해 어떠한 노력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구가야권의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신라하대 이래 구가야권 지역에서도 중앙정부에 비판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 분위기는 이 지역에 호족의 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김해부 진례성의 지방관이었던 소율희는 892년 무렵 지제군사직의 보유를 계기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김해지방 호족인 소율희는 당시 이 곳의 가야전통 분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정치질서의 재편을 이루어갔다. 이를 위해 당시 김해지방의 토착세력인 규림계 및 영규계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와의 숙인을 정치적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결합과정에서 가야부흥운동의 기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가야부흥운동의 기운이 주변의 구가야권으로 확산되어 구가야권 호족세력들이 연합하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지방사회에서 정치질서의 재편을 이루어가는 데에 그 명분과 실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 4장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당시의 실질적 지배세력인 호족들을 어떻게 재편하여 나갔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 보았다. 이 문제를 고려 태조의 政策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연구를 통하여 고려의 태조가 국내외에서 후삼국 통일을 위한 正當性을 확보하기 위해 행한 일련의 정책을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왕건은 후삼국통일의 모범을 중국사에서 ‘尊周’라는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하여 한 나라를 창업한 고조의 사례에서 찾고 있었다. 왕건은 대외적으로 친신라정책을 표방하고 신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왕건도 신라와 군신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 국가의 지배자였지만, 그도 변방의 지방인 출신이란 신분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만을 없었을 것이다. 이는 고려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이었다. 태조는 지방의 호족들과 군신관계를 설정하는 정책을 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태조는 신라와도 군신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관계를 이루었다. 태조는 신라로부터도 한 국가의 지배자로 인정받는 단계에 이르자, 그는 對中通交를 더욱 강화하였다. 태조는 내부적으로는 고려의 중심성을 창출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강구하였던 것이다. 제 5장에서는 新羅末·高麗初라는 전환기에 정치질서의 재편을 위한 다양한 사상적 모색을 검토하였다. 이 문제를 당시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崔彦?의 政治思想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그의 현실인식과 중국사라는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그는 당시의 정치현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신라의 국운이 난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곧 신라의 쇠퇴와 이를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현실을 난세를 극복할 성스러운 기운이 일어나는 시기로도 보고 있었다. 또한 후삼국의 정치현실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상을 중국사에서 찾았다. 다음으로 최언위의 사상적 배경을 당시 선승의 비문을 찬술하는 과정에서 인용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유학의 經典 가운데에서는 『論語』를, 그리고 유학의 인물 가운데에서는 孔子를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는 곧 그가 유학에서 『논어』와 공자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을 의미하며, 이들 경서와 인물이 그의 학문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공자 중심의 유학을 바탕으로 한 유학자였지만, 그밖에 불교는 물론이고 노장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그의 불교관은 신라 중대 유학자의 그것과는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그가 박학을 중시하였던 사실은 아마도 신라말의 혼란상을 해결하기 위한 사상적 모색을 다양한 사상에서 찾으려는 그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곧 그는 다양한 사상을 바탕으로 후삼국의 분열기를 재편할 정치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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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요약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on the reorganization of the political order with the transiton from the late Silla to early Koryo. Especially this paper focused on the point of view that approaches from harmony rather than conflict, the balance between change and maintenance, and the organic relationship between an indivisual fact and whole history. My concern is to deal with the following issues in those perspective. Chapter two indicates the process of reorgainzation in political order through Jijegunsa(知諸軍事) which reemerged from the late Silla plunged in confusion. Jijegunsa came out again through the social transiton that was led by a peasants'' rebellion in from the late Silla to early Koryo. It would serve as a provisional post which vested military powers in the County Magistrate(地方官) who had been charged with administrative rights to quell the regional rebellions when it was set up the Middle Silla(新羅 中代). As the government was losing its power in late Silla, most of local communities rebelled against government. Thus the government needed to resurrect the post to quell them. Throughout the process government authorized County Magistrate who only had the administrative rights to rule the forces as well or County Magistrate was appointed as the post when he was sent to regions. The system of Jijegunsa that served as the County Magistrate took effect in not only Silla but also Koryo and Later Paekche(後百濟) for the same purpose. However the system of late Silla changed greatly despite of its primary purpose. It became an important chance that Local Gentry(豪族) extended their influences. The County Magistrate would often turn into Local Gentry abusing his authority and then he didn''t make his position clear to maintain his existence and growth. Sometime he took his stand either pro-Silla or anti-Silla. Chaper three deals with the efforts that the Local Gentries in the former Kaya regions made for their survival and development in the period of the Later Three Kingdoms. In the late period of Siila there had been shaped a critical atmosphere in the former Kaya regions like Kimhae. Those served as a momentum to accelerate the appearance of local gentries in these regions. So Yul-hee,a local government official in Jinye-s?ng, Kimhae-pu grew into local gentry as he posessed the position of Jijegunsa toward 892. Especially the ancestral rites of King Suro was an Important factor to strengthen the solidarity among Kimhae people. There was no concrete records about the political movements in Kimhae some activities of local powers helped me feel the atmosphere of Kaya restoration movements. Another examples were indigenous powers like the Y?unggyu faction and the Gyurim faction. They were the same descendants of King Suro,but had different backgrounds. On this Situation So Yu1-hee made use of the tradition of Kaya for concenrtating the local powers. And their political efforts have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restoration movement of Kaya. Considering the facts that the two regions adjoining each other were the former Kaya regions and there was an atmosphere for restoration of Kaya in Kimhae, it might be said that the local gentries in the former Kaya regions allyed themselves for the rstoration of Kaya. Chaper four deals with how the government reorganized Local Gentry, who was the powerful ruling class in local region, on a national level. The policy of King T''aejo(太祖) in Koryo has been brought to my attention in particular. This approach can provide the legitimacy for unification of the Later Three Kingdoms(후삼국) that Wang Kon(왕건) wanted to get(make) performing a series of policies at home and abroad. Wang Kon(왕건) began to make a model of the instance of GoJo(高祖) who had built up Han(漢) claiming to stand for a good cause, 尊周. He externally stood for pro-Silla and observed good manners acted as liege homage. This relations of sovereign and subjest must have been reasonable in the current of the times. However he was a ruler of a nation, he wasn''t free from the restriction on status. Because he came from a province. This problem was directly related to getting get the orthodoxy. He also practiced the policy to fix the relations of sovereign and subjest between the Local Gentry(豪族) and the king. Moreover he maintained an equal relations with Silla differently from what it used to be. When acknowledged as a ruler from Silla, he began to strengthen an interchange between Koryo and China. As a result he constantly had tried to find ways to create inner centripetal force. Chapter five examines various ideological solutions to reorganize the political order with the transiton from the late Silla to early Koryo. Especially political ideas of Ch''oe Eon-Wi(崔彦?)who was a representative confucianist in its day are focused. And I intended to research into the problems both his understanding of reality and Chinese history first. Ch''oe understood its political conditions in two aspects. One was that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country was in chaos. The appearance of a new political force was followed by the decline of Silla instead. Another was that the present was regarded as an important period to overcome the crises. Also he tried to search for the ideals in politics that Later Three Kingdoms pursued from chinese history. In addition this chapter indicates his idealogical background through his quotation on the apitaph. He would frequently cite “Lun-yu(論語)” out of the confucian classics and quoted Confuciu(孔子) much more than any other confuican. Both Lun-yu and Confucian meant a great deal to him. And his academic background consisted of these. Although he was obviously a confucian based on Confucianism, he understood throughly from Buddhism to Taoism. He was different from confucians of the Middle Silla(新羅 中代) in opinion of Buddhism. The fact that he laid emphasis on wide knowledge was related to his political attitude trying to end up confusion in late Silla. He planned to reorganize the political order based on various the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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